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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Jan 28. 2019

괴산향교

군자는 의리에 밝고 소인은 이익에 밝다.

친구 혹은 연인 간에 의리는 사람 사이에 지켜야 하는 가치에 있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돈은 필요하지만 정도가 있는 이익 추구는 필요하다. 어질다는 의미의 인은 향교 교육의 기본이 아니었을까. 인이라는 것은 본인이 서고자 할 때 남부터 서게 해 주고, 자신이 뜻을 이루고 싶을 때 남부터 뜻을 이루게 해주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의리는 그렇게 서로를 지탱시켜주고 서로를 만들어주는 것이다. 

 괴산향교는 조선 초기에 군의 북쪽에 처음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데 중종 16년(1521)에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고 한다. 여러 차례의 중수를 거쳐 오다가 1981년에 대성전 명륜당을 완전히 보수하여 오늘의 모습을 갖추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인격을 수양하지 못하는 것, 배운 것을 익히지 못하는 것, 옳은 일을 듣고 실천하지 못하는 것, 잘못을 고치지 못하는 것, 이것이 나의 걱정거리다." 

괴산향교의 대성전 안에는 5성(五聖)의 위패가, 동무·서무에는 송조 2현(宋朝二賢) 및 우리나라 18현(十八賢)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는데 이 향교는 충청북도 시도 유형문화재 제102호로 지정되어 있다. 

괴산은 삼국시대에는 삼국의 접경지대로, 처음에는 고구려의 잉근내현·상모현(上芼縣: 지금의 연풍면)·도서현(道西縣: 지금의 도안면·청안면)이 되기도 했다. 고려시대에는 괴주(槐州)라 불렀는데, 1018년(현종 9)에 장연(長延: 상모현에서 개칭)과 함께 충주목의 관할 하에 들어가 있었다. 

괴산의 근대 인물을 살펴보면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순사 한 홍범식(洪範植), 3·1 운동을 주도한 홍명희(洪命熹)·경권중(慶權重), 광복단의 정운기(鄭雲淇), 1914년 북만주로 건너가 광복회를 조직한 경석조(慶錫祚)등이 있다. 

한결같은 마음을 지니고 살기도 어려운 세상이지만 옛사람의 흔적을 찾고자 하면 조금은 한결같은 마음을 가지고 살 수 있을 듯하다. 괴산에는 괴산향교를 비롯하여 청안향교·연풍향교가 있으며 1622년(광해군 14)에 설립된  칠성면 송동리의 화암서원(花巖書院)과 근대 교육기관의 시초는 1905년경 선교사 밀러(Miller, 한국명 閔老牙)가 일도면에 사립 돈신남소학교(수업연한 4년)이 있다. 


공자조차 군자의 세 가지 도를 실천하지 못했다고 스스로 말했다. 인한 사람은 근심하지 않고, 지혜로운 사람은 미혹되지 않고, 용감한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는다.  매년 음력 정월 14일에 제주가 장압산에 있는 신목에게 메와 과일만 차린 유교식의 초산제를 지내는 괴산은 다양한 민속문화가 내려오는 곳이지만 잘 알려진 것이 없기에 새로운 것을 탐할만한 지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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