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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Feb 19. 2019

음성 운곡 서원

군자는 걱정이 없고 두려움이 없다. 

주변을 보면 사서 걱정하는 사람이 참 적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안으로 살펴서 꺼림칙한 것이 없다면 대체 무엇을 걱정하고 무엇을 두려워한다는 것인가. 대부분은 욕심에서 걱정의 씨앗은 생겨난다. 최근에 많이 듣는 소리가 여유로워 보인다는 말이다. 군자는 마음이 평안하여 느긋해하며 소인은 불안하여 끙끙거린다고 하는데 이는 내면의 평온을 찾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음성 운곡 서원으로 가는 길목에는 집에 태극무늬의 문양이 아름답게 그려져 있었다. 누가 저곳에 저런 페인팅을 했는지 모르지만 의미가 있어 보였다. 

원래 음성 운곡 서원은 백운 서당이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져서 운영되다가 조선 선조 때 정구가 충주목사로 왔다가 주자를 모시고 세운 것을 추후 정구를 모시며 운곡 서원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도가(道可), 호는 한강(寒岡). 철산 군수 정윤 증(鄭胤曾)의 종손인 정구는  10세에 『대학』과 『논어』의 대의를 이해하였다고 한다. 

정구는 학문은 성리학과 예학뿐만 아니라 제자백가·역사·산수(算數)·병진(兵陳)·의약(醫藥)·복서(卜筮)·풍수지리 등 여러 방면에 걸쳐 박학하였다고 한다. 정구는 인조반정 직후인 1623년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1625년 문목(文穆)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이곳에 모셨다는 정구의 삶을 살펴보면 용서와 상생을 추구했던 인물이라는 것을 보게 된다. 중앙 관직보다는 지방의 수령으로 더 많이 활약하였던 정구는  1608년(광해군 즉위년) 임해군(臨海君)의 역모사건이 있자 관련자를 모두 용서하라는 소를 올리고 대사헌직을 그만두고 귀향하였다. 그리고 1613년 계축옥사(癸丑獄事) 때 영창대군(永昌大君)을 구하려 했으며, 1617년 폐모론(廢母論) 때에도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서인(庶人)으로 쫓아내지 말 것을 주장하였다. 

행동거지가 올바르지 않은 사람에게도 배울 것이 있다. 사람의 착한 것을 골라서 쫒을 것이고 좋지 않은 점이 있다면 그것을 자신 가운데에서도 찾아내 고친다. 지자는 물처럼 흐르기를 좋아하며 인자는 풍성한 생명을 키우는 산을 좋아한다. 지자는 움직이고 인자는 고요하다. 지자는 즐기고 인자는 기원한다. 

1963년에 중수하여 오늘날 에이르고 있는 운곡 서원의 전체적인 배치는 뒤쪽에 사당을 두고 앞쪽에 강당을 둔 전학후묘배치법의 기본을 따르고 있으며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홑처마 맞배 기와지붕을 하고 있지만 강당은 주초석만 남아 있는 상태다. 

1580년 비로소 창녕 현감에 부임했고, 이때 베푼 선정으로 생사당(生祠堂)이 세워졌던 정구는  1591년 통천 군수가 되었는데, 그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각 군에 격문을 보내 의병을 일으키도록 했다. 고향에 백매원(百梅園)을 세워 유생들을 가르쳤던 정구는 당대의 명문장가로서 글씨도 잘 썼다고 한다. 시호는 문목(文穆)이다.


음성 운곡 서원 : 충북 음성군 삼성면 청용로 365번길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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