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는 누군가 Mar 01. 2019

융릉. 건릉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를 기리다. 

한국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가 보면 어느 곳을 소개함에 있어서 절대적인 시간이 필요한 곳이 있다. 차를 세우고도 한참을 걸어가야 만날 수 있는 곳인 묘다. 주로 산이나 차로 접근하기 힘든 곳에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왕의 묘인 릉은 평지에 만들어지기도 하지만 왕의 묘답 게 상당히 넓은 면적을 차지한다. 경기도에 있는 조선왕의 묘는 대부분 두 사람의 왕이 양쪽으로 자리하는 경우가 많다. 그곳을 둘러보기 위해서는 3~4km는 족히 걸어야 한다. 

절대적인 권력을 가지고 무엇이든지 좌지우지할 수 있을 것 같은 왕은 그 권력에 대해 남다른 책임감을 가지고 있었다. 일부 폭군도 있었지만 조선왕조에서 왕이 되기 위해서는 일반 백성이나 양반보다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했다. 그리고 왕가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누구나 왕이 될 수는 없었다. 사도세자는 영조가 보았을 때 왕의 그릇이 아니었다. 그러나 정조의 입장에서는 아버지라는 그릇이었다. 

노론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할아버지 영조의 보호 아래 왕이 될 수 있었던 정조는 왕에 오르자마자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공표한다. 그리고 사도세자 혹은 장현세자라고 칭했던 아버지를 장조에 추존하고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와 함께 융릉을 만들어 아버지의 복위에 노력을 기울인다. 

1919년에 세상을 떠나면서 삼일운동을 촉발시킨 고종은 1900년에 융릉에 비석을 추가로 세우면서 자신이 직접 글씨를 쓴다. 왕이 되지 못한 채 뒤주에 갇혀 죽은 사도세자(장헌세자)는 정조 때는 세자의 이름을 유지하였으나 1899년 고종은 장조로 격상하면서 현륭원을 융릉으로 높여 능으로 대우하게 한다. 

수은묘, 영우원, 현륭원을 거쳐 융릉으로 불리게 된 묘는 조선왕릉에서 유일하다. 이곳 화성에 융릉이 자리하게 된 것은 1789년으로 현륭원이라는 의미는 "낳아주고 길러주신 현부에게 융숭하게 보답한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 

비록 아들인 사도세자를 뒤주에 갇혀 죽게 하였지만 영조는 손자인 정조에게 아래와 같은 말을 남기고 한 달 뒤에 세상을 떠난다.


"해동 300년의 우리 조선은 83세의 임금이 25세의 손자에게 의지한다. 듣건대 어제 손자가 사도세자 무덤에서 했던 행동은 사람들의 옷깃을 눈물로 적실 만하였다... 내 손자야, 할아버지의 뜻을 체득하여 밤낮으로 두려워하고 삼가서 우리 300년의 종묘사직을 보존할지어다." 

우선 정조와 왕비가 있는 건릉으로 먼저 올라가 본다. 조선왕조의 왕들의 묘는 혼자 모셔진 릉과 합장릉으로 구분이 된다. 영조의 원릉, 사도세자의 융릉, 정조의 건릉, 순조의 인릉, 헌종의 정릉, 철종의 예릉, 고종의 홍릉, 순종의 유릉이 조선왕조의 마지막을 이었다. 

사도세자와 정조는 합장릉으로 조성이 되었다. 빨리 걷는다고 걸었는데도 불구하고 이곳까지 오는데 20여분이 걸렸다. 좀 가까운 곳에 주차장을 만들어주어도 좋지 않을까란 생각도 하지만 이리 만들어두어야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이나 이곳을 찾아오는 사람이 운동 좀 하지 않겠는가. 

조선의 왕이 묻힌 곳은 서울과 경기도를 벗어나서 만들어진 곳은 없다. 파주, 고양, 김포, 서울, 남양주, 화성, 여주 등에 대부분 조성이 되어 있다. 그렇지만 왕세자가 태어났을 때 태를 묻은 태실은 전국적으로 조성이 되어 있다. 

융릉비문 - 정조 이산 (조선 정조 13년)


"소자(아들 정조를 가리킴)가 즉위하던 병신년(1776)에 시호를 장헌으로 추상하고 원호를 영우로 올렸다. 계묘년(정조7, 1783)에 존호를 수덕돈경이라 추상하였고, 이듬해인 갑진년(1784)에는 존호를 홍인경지라 가상해 올렸다. 기유년(정조13, 17889)10월초 7일에 수원의 화산계좌의 언덕으로 천봉하고 원호를 현륭으로 고쳤다."

정조는 규장각 서재에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라는 글귀를 걸어 두고 늘 바라보았다고 한다.  ‘모든 냇물에 골고루 비추는 밝은 달과 같은 주인 늙은이’라는 의미다. 정조는 죄수들이 감옥에 있을 때에는 결박을 하지 못하게 했으며 형틀을 씌우지 말도록 했다. 이 명은 일제강점기 때 와서 일본에 의해서 어겨지며 다시 부활한다. 음악만이 아니라 문장, 그림, 도장 등 문체와 예술의 취미도 높았고 안목도 있었던 정조는 박지원과 그 제자들이 비어 · 속어를 쓰는 문체를 유행시키자, 그는 박지원을 불러 꾸짖기도 했다. 

정조가 자주 찾던 공간에 그도 같이 아버지인 사도세자와 같이 묻혀 있다. 정조는 서자 출신의 박제가를 늘 곁에 두었고 소외당하던 서북 출신의 이응거를 등용하였으며  과거에 합격해 입학했지만 서얼들은 따로 분리되어 앉아야 했던 성균관의 고질적인 차별을 시정하라고도 했다. 지금에도 문제시되고 있는 대통령을 통하는 왜곡된 소통의 문고리를 없애기 위해 수령들에게 지방의 실정을 알릴 일이 있으면 승정원을 거치지 않고 왕에게 직접 보내게 했다. 

백성의 소리를 듣는 일을 하기 위해 화성에 있는 아버지의 무덤으로 행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던 정조는 백성들이 억울한 일이 있으면 징을 울리는 격쟁(擊錚)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정조는 징소리를 들으면 가던 길을 멈추고 사정을 호소한 원정(原情)의 글을 받았던 것이다. 지금도 서울의 경복궁에 가면 북을 치는 신문고라는 곳이 있으나 당시 그곳은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아무나 들어올 수 없으니 자신이 나가서 백성의 소리를 듣고자 했던 정조의 혼이 화성에 잠들어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자주의 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