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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Mar 10. 2019

꽃이 피었소

홍길동의 고장 장성 필암서원

3월 10일 하루를 들여다본다. 그러다 보면 3월 한 달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오겠지. 하루에 나에게 오는 에너지가 있겠지 그중에 좋은 것도 있고 나쁜 것도 있을 것이다. 서로를 상생시키는 좋은 에너지를 주는 관계가 있고 시간을 소모적으로 소비하게 만드는 좋지 않은 관계도 있다. 그런 것을 생각하는 시간 속에 꽃이 피어 있었다. 그 꽃은 대원군의 서원철폐 때 남은 47개 서원 중 하나인 장성의 필암서원에 피어 있었다.

 

죽은 자신을 기리기 위해 무언가가 만들어진다는 것은 얼마나 큰 영광일까. 서원은 그렇게 세워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지금은 예술가나 큰 공적을 남긴 사람의 흔적을 위한 기념관으로 자리하고 있다. 

필암서원을 세우게 만든 김인후는 장성 출신이다. 김인후는  을사사화(乙巳士禍)가 발생하자 병을 핑계로 사직하고 고향 장성으로 돌아와 다시는 벼슬할 마음을 끊고, 산림에 은둔한 채 술과 시로 울분을 토로하며 세월을 보냈다. 1546년(명종 원년) 고향에 묻혀 절의를 고수하던 그가 택할 수 있는 길은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뿐이었다. 

벼슬길에 오르려는 사람이나 시험을 보고 공직에 들어가려는 사람 중 일부는 화사하게 피어나는 꽃이 되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절의(節義)'를 고수하는 생활로 일관했던 김인후는 을사년 이후 매년 여름에서 가을로 바뀔 무렵이면 글을 그만두고 손님도 만나 보지 않으며, 우울한 기분으로 날을 보내며 문밖을 걸어 나간 적이 없었다.

임의 나이 삼십을 바라 볼 때, 내 나이 서른하고 여섯이었소.

신혼의 단꿈을 반도 다 못 누렸는데, 시위 떠난 화살처럼 떠나간 임아.

내 마음 돌이라서 구르지 않네, 세상사 흐르는 흐르는 물처럼 잊혀지련만.

한창 때 해로할 임 잃어버리고 나니, 눈 어둡고 이 빠지고 머리가 희었소.

슬픔 속에 사니 봄가을 몇 번이더냐, 아직도 죽지 목해 살아 있다오.

백주는 옛 물가에 있고, 남산엔 해마다 고사리가 돋아나누나.

오히려 부렵구려 주왕(周王) 비의 생이별은, 만난다는 희망이나 있으니. - 유소사

글에는 도가 있다. 글에 도가 있다는 것은 사람을 이끌어주는 길을 보여준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의 문장은 이와 같이 도가 나타난 것이었기에 도를 높이려는 선비들은 자연히 그의 문장을 따르게 되었다고 한다. 

하서 김인후(金麟厚)를 기리기 위해 건립했던 필암서원은 1590년(선조 23) 김인후의 문인 변성온 등이 주도하여 기산리에 서원을 세웠는데, 이 서원은 정유재란 때 소실되었다가 1624년(인조 4) 복원되었다. 1662년(현종 3) '필암'으로 사액되었으며 1672년 지금의 위치로 이전했다.

최근 이 분야의 어떤 모임에서 과분한 칭찬을 받은 적이 있다. 필자의 글이 각 지역마다 글을 써서 지자체에 기고하는 이들에게 가야 할 길을 보여주기에 많은 도움을 받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글의 길이 아직도 멀었지만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스스로를  다시 돌아보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필암서원에는 공부하는 공간으로 활용되는 필암서원과 서원의 출입문과 유생들의 휴식공간 역할을 하는 문루인 학연루, 서원 유생들이 회의하고 공부하는 공간인 청절당, 서원의 원생들이 생활하던 동재와 서재, 정조 임금이 김인후 선생을 문묘에 배향하면서 세운 경장각, 필암서원의 사당으로 우동사, 김인후 선생의 문집 목판이 있는 장판각이 보존되고 있다. 

김인후가 써 내려간 글에 있던 절의는 독립운동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의 불의에 맞선 절의 정신은 실천적 도학으로 계승되어 호남 사림들로 하여금 나라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분연히 떨쳐 일어나 구국의 대열에 앞장서게 하여 임란 의병ㆍ구한말 의병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자신의 정신세계를 펼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그와 소통이 잘되었던 인종을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도 그 깊은 뜻을 이해하지 못했고 그의 입지를 펼칠 수 있는 상황을 허락해주지 않았던 것이니 그로서는 불우한 시대를 만나 그 높고 깊은 경륜을 펼칠 수 있는 기회를 만나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필암서원을 거닐다가 문득 위를 올려다보니 꽃이 피어 있었다. 반드시 만날 사람은 만나고 반드시 켜지는 것이 인생이니 너무 서두르지 말자. 

장성에 은거하면서 매년 피어난 꽃을 보았을 김인후는 1560년(명종 15) 음력 1월 16일 고향 장성으로 은거한 지 15년여 만에 병이 위급하여 자리를 바로 하더니 51세의 나이로 여유롭게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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