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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Mar 13. 2019

몽상가(夢想家)

두보의 시혼을 혼에 담고 싶은 사람의 봉산서원

몽상가를 보통 연상하는 사람들은 실제로 일어나지도 않을 헛된 생각에 곧잘 잠기거나 그런 생각을 즐기는 사람의 사전적인 의미를 생각하기 쉽다. 상상을 현실화할 수 있는 몽상가와 상상이 다른 상상으로만 나아가다가 끝나는 몽상가와는 차이가 있다. 꿈을 꾸는 사람의 얼굴에는 미소가 있고 목표가 뚜렷한 사람이 단단하게 이뤄나가는 사람은 불행하기가 어렵다. 조선 중기의 학자이며 만 권의 책을 읽은 후 붓을 들면 신들린 듯 글을 지을 수 있다고 말을 했던 두보의 시혼을 붓 속에 불어넣은 노수신을 모신 곳이 봉산 서원이다.

만 권의 책이라고 하면 옛날과 지금은 상당히 다르다. 지금의 한 권은 옛날의 책 한 권보다 양이 상당히 더 많다. 그러니 지금 시대에 만 권의 책을 제대로 읽었다면 그 노력이나 다스림에 있어서 본받아 마땅하다.  1688년(숙종 14년)에 지역 유림들이 봉황산(化西面 鳳凰山) 아래에 사당을 세우고 이듬해에 강당을 건립했다가 1708년(숙종 34년) 무자(戊子)에 노수신(盧守愼) 선생을 배향(配享)하고 또한 일송 심희수(一松 沈喜壽), 판곡 성윤해(板谷 成允諧) 등 2분을 함께 배향하며 예조(禮曹)의 승인(承認)을 얻어 서당을 서원으로 승원(陞院) 한 것이 지금의 봉산 서원이다. 

노수신이라는 학자를 이야기하려면 드라마 여인천하의 주축이었던 문정왕후가 등장할 수밖에 없다. 1543년 식년 문과(式年文科)에 장원급제한 이후 벼슬을 하던 노수신은 인종 즉위 초에 정언이 되어 대윤(大尹)의 편에 서서 이기를 탄핵해 파직시켰으나 1545년 명종이 즉위하고 소윤(小尹) 윤원형(尹元衡)이 을사사화를 일으키자 이조좌랑의 직위에서 파직돼 1547년(명종 2년) 순천으로 유배되었다. 윤원형이 바로 문정왕후의 오라버니다. 

노수신의 삶을 보면 긍정적인 몽상가의 삶을 살았던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온유하고 원만한 성격으로 인해 사림의 중망을 받았으며 그의 덕행과 업적의 성과는 매우 다양해 왕과 백성들, 그리고 많은 동료들에게 영향을 줬다고 한다. 수많은 인생의 역경 속에 자신이 꿈꾸는 대로 살았던 사람이랄까. 

찾는 사람이 없을 때 찾아온 봉산 서원은 조용하면서도 비교적 최근에 지어져서 깔끔한 느낌이었다.  1868년(고종 5년) 무진(戊辰)년에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이 내려져 훼철(毁撤)되었다가 1923년 계해(癸亥)년 사림(士林)의 중론(重論)에 의해 설단 단향(設壇 壇享) 해 오다가 영남유림(嶺南儒林)의 발의(發議)로 복원공사(復元工事)를 했다.  2004년 갑신(甲申)년에 정부의 지원을 받아 묘우를 기존의 위치에서 조금 뒤에 새롭게 건립했다. 이어 2009년 기축(己丑)년 봄에 강당을 준공해 서원의 면모를 새롭게 했으며 묘호(廟號)는 경현사(景賢祠)다.

동을 할 때 누군가가 그런 말을 했다. 불꽃이 튈 것 같이 참 열심히 한다라는 말이다. 필자는 그냥 그 시간에 충실할 뿐이다. 그 시간은 다시 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의 시간은 소중하고 나에게 돌아오지 않을 시간이다. 오랜 유배생활 가운데서도 학문에 대한 열정을 꽃피운 소재 노수신은 어떤 세상을 꿈꾸었을까. 

유배를 가는 것은 곤궁해지는 삶으로 빠지는 것이다. 현대의 의미로 이야기하면 커리어가 망가지는 일이다. 군자라고 해도 당연히 곤궁하지만 소인은 곤궁하면 허둥대고 형편없어진다고 한다. 

봉산 서원의 입구로 들어가면 서원 오른쪽 안에 묘우인 경현사가 엿보이며 중앙에는 강당인 선교당(宣敎堂)과 왼쪽에는 명변재(明辨齋) 오른쪽에는 심문재(審問齋)가 자리하고 있다. 

학문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항상 열려있지만 마음이 닫혀 있으면 들어가지 못한다. 노수신이  진도에 귀양 갔을 때 그 섬 풍속이 본시 혼례라는 것이 없고 남의 집에 처녀가 있으면 중매를 통하지 않고 칼을 빼 들고 서로 쟁탈했던 것을 바꾸었다고 한다. 섬이라는 고립된 곳에서 오래된 풍습을 바꾼 것을 보면 그는 어떤 의미에서 보면 몽상가이지 않았을까. 만 권을 책을 읽고서야 비로소 붓이 제대로 쓰였다는 두보처럼 그 역시 노력하는 사상가였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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