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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Mar 19. 2019

착량묘(鑿梁廟)

파서 만들고 도망가다. 

임진왜란 당시에 일본은 이순신이 얼마나 미웠을까. 병참선을 뚝뚝 잘라버리는 그의 활약에 생각 외의 복병이 있다고 생각하며 그를 제거하고 싶었을 것이다.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운 이순신 장군의 위패와 영정을 모시고 있는 사당으로 착량(鑿梁)은  ‘파서 다리를 만들다.’는 뜻을 담고 있다.  당포해전 당시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수군에 참패를 당한 일본 수군이 쫓겨 도주하다가 미륵도와 통영반도 사이에 좁게 연결되어있는 협곡에 도달하여 돌과 흙을 파서 다리를 만들어 도망했다고 한다. 

착량묘는 비바람으로 퇴락된 채 오랜 세월을 견디어 오다가 1974년 2월 16일 경상남도 기념물 제13호로 지정된 이래 1985년까지 5차례에 걸쳐 정화사업을 벌여 동재와 고직사(庫直舍), 외삼문, 일각문을 신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는 곳이다. 

당시 고성의 사량도(蛇梁島:통영시 사량면 양지리) 앞바다로 옮겨가서 휴식을 취하며 일본군의 정세를 수색하였는데 다음날 아침 일본 수군이 당포 선창에서 정박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곧 출동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척후장의 군관이자 흥양보인인 진무성(陣武晟)이 그 적장의 머리를 베어내자, 일본군은 사기를 잃고 도망치기 시작했는데 추격을 하여 적의 병선 21척을 모조리 불태웠다.

옥포 첫 싸움에서 대승한 우리 수군은, 계속해서 제2차로 사천·당포(통영 부근)·당항포(고성, 회화 간)에서 싸우게 되었는데 당포해전으로 인해 이곳에 일본인의 흔적을 깊게 새겼다. 

착량묘가 무엇인지 몰랐다가 이곳에 와서야 이순신의 흔적임을 알게 되었다. 

역시 남해의 끝자락에 자리한 통영이라서 동백꽃을 보는 것이 어렵지 않다.  중국에서는 해홍화(海紅花)라고 부르며 동백이란 말은 우리나라에서만 사용한다. 동백의 꽃말이 ‘나는 당신만을 사랑합니다.’이다. 동백은 꽃이 질 때 송이 째 떨어지는 특징을 지니며 꽃은 차로 이용한다.

통영은 이순신 장군의 흔적이 적지 않은 곳이라고 알고 있었지만 착량묘에 다시 모셔지고 있음을 이번에야 알게 된다. 

사당 같아 보이기도 하고 다른 측면으로 살펴보면 마치 서원이나 서당 같은 느낌이 드는 곳이다. 공의 충절과 위훈을 후세에 길이 전하고자 판도가 바라보이는 착량언덕에 초옥을 짓고 공의 위패를 모시어 춘추 향사와 기신제를 모시었으니 이것이 이충무공 사당의 효시다. 

고종 14년(1877) 공의 10 세손 이규석 제198대 통제사가 초가집을 기와집으로 고쳐 짓고 그 이름을 착량묘라 하였으며 이때 호상 재도 같이 지어 지방민의 자제들을 교육시켰다. 

당포해전 이후에 1592년(선조 25) 6월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당포해전에서 도주한 왜선이 당항포에 있음을 알아내고 전라 우수사 이억기, 경상 우수사 원균과 함께 공격하여 왜선 26척을 격파했다. 이것이 당항포해전(唐項浦海戰)이다. 착량묘로 이름을 지어준 그 해인 1877년은  구마모토현·미야자키현·오이타현·가고시마현에서 사이고 다카모리가 맹주로서 주도하여 일으킨 사쓰마 번 사무라이의 무력 반란인 세이난 전쟁이 일어났으며 일본을 강국으로 나아가게 만든 메이지 유신의 완성이 되는 해라고 볼 수 있다. 세이난 전쟁은 일본 최후의 내전이며 사족이라고 하는 군사전문직의 사무라이의 존재를 소멸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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