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치 국가만이 정당하다.
한국영화 극한직업과 증인을 보았다. 극한직업을 본 것이 먼저이지만 증인이라는 영화가 가진 가치가 더 있기에 먼저 글을 쓴다. 법치 국가에서 정부는 법원은 주권자인 시민을 대신하여 일하는 공무원에 지나지 않는다. 시민의 공통의 이익을 추구하는 일반 의지에 기초하여 업무를 행하는 것이 이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그렇게 해왔는가를 보면 그렇지 않다. 사법 농단과 국정농단을 일삼으면서도 그것이 옳은 것이라고 말하는 이상한 사회가 정상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많기 때문이다.
자신의 생활이 어렵기에 신념은 잠시 접어두고 현실을 위해 속물이 되기로 마음먹은 민변 출신의 대형 로펌 변호사 순호는 자신이 지금까지 입던 옷과 다른 옷을 입으려고 한다.
"권총을 가진 사람에게 협박을 당했을 때는 자신의 지갑을 건네지 않으면 죽임을 당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이 권총을 가진 사람에게 지갑을 건네야 한다는 정당한 의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의미하지 않는다." - 루소
이득 앞에서 자신의 신념을 접어두는 일은 권총에 협박당해 목숨을 위협받는 일과 비견될 수 있을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우선 살 수는 있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서 증인으로 등장하는 지우는 모든 것을 기억하고 계산하고 다른 기준으로 판단할 수 있지만 소통방식이 다르다. 유력한 살인 용의자의 무죄를 입증해야 하는 변호사 ‘순호’가 사건 현장의 유일한 목격자인 자폐 소녀 ‘지우’를 만나면서 소통을 이야기한다. 보통 생각하고 있던 생각 해야 마땅하다고 하는 그런 선입견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모르기에 용감하다고 말할 수 없다. 정직하기에 용감할 수 있는 것이다. 자기만의 세계에 집중하며 소통이 서툴렀던 지우가 사건의 증인이 되어 세상과 소통하려는 용기를 갖게 되는데 그 과정 속에 속물이 되어보려는 변호사와 증인을 넘어선 교감이 느껴진다. 자신의 이득에 의해 속이고 무죄가 되어보려는 범죄자와 현실에서는 만나보기 힘든 좋은 사람이 되어보려는 변호사의 이야기이지만 아주 약간의 가능성이 있기에 따뜻하다고 할까.
오래전 교회는 인간은 신이 정한 질서대로 살아가야 하는 존재이며, 인간에게 옳음을 판단하는 능력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철학자 루소는 최강자의 원리를 당당하게 비판했다. 힘이 권력의 정당한 근거가 될 수 없다고 말했다. 영화 속에서는 힘이 정당한 근거라고 말하고 있지만 폭력에 의한 협박은 비판받아야 하며 부당하게 얻은 권리는 무효라고 되받아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