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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Apr 01. 2019

물과 같이 살다.

정몽주를 추모한 영천 임고서원

영천에 가보고서야 임고서원이 규모가 큰 것을 처음 알았다. 정몽주를 기리고 추모하며 세운 임고서원은 정몽주 개인의 삶의 이야기가 가장 많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근원을 가진 샘물은 솟구쳐 나와 밤낮으로 쉬지 않고 흘러가며 움푹 패인 웅덩이들을 다 채운 후에는 앞으로 나아가 큰 강에 까지 이른다. 근원이 있는 것은 이와 같다. 고려에 대한 역사를 기록한 고려사는 조선시대에 만들어졌다. 조선의 개국을 막으려던 정몽주는 고려사에서 긍정적으로 쓰였다. 

보통 사람들은 자신이 잘하는 분야에만 집중하고 다른 분야의 지식을 습득하는 데에는 소극적으로 임한다. 그래서 폭넓은 지식을 가진 사람이 많지 않지만 폭넓게 배우고 자세하게 살펴보는 것은 장차 핵심적인 요점을 말하는 것으로 되돌아오기 위함이다. 

임고서원 안에는 건물들도 많고 배움의 프로그램도 많이 진행되기에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는 곳이다. 단심가 혹은 선죽교에서 이방원에게 죽임을 당한 고려말 충신 정도로만 알고 있는 정몽주는 부지런히 공부하고 성리학을 연구하여 다양한 지식을 습득하였다고 한다. 

가끔 의구심이 들 때가 있다. 포은 정몽주와 이방원이 서로 밀실에서 시를 주고받았다고 하며 이방원은 향후 그 누구에게도 그 말을 한 적이 없다고 하는데 대체 그 이야기는 어디서 새어 나온 것인가. 인재의 등용과 왕명 출납 제도의 개혁 등은 지금 청와대의 민정수석이 하는 일이라고 보면 된다. 

과거가 어렵다고 말했지만 결국 그 근본은 방대한 지식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그를 기반으로 과거 시제에 대한 글을 쓰는 것이다. 정몽주의 답안을 보면 이런 글이 나온다. 문만 사용하고 무를 쓰지 않으면 예기치 않은 사태를 당하였을 때 구해낼 수 없고, 무만 사용하고 문을 쓰지 않으면 인심이 어긋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그러므로 문과 무를 함께 써 하나로 한 연휴에 천하의 다스림을 얻을 수 있다고 쓰고 있다. 


모든 것이 글에서 시작하고 글로 이어지지만 자신의 몸을 다스리는 것은 정말 중요하기에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한쪽만을 편애하는 것은 균형적이지 못한 사람으로 서는 것이다. 

포은 선생이 26세 때인 1362년에 그의 과거 시험 감독관 김득배가 김용이란 간신에게 모함을 받아 상주에서 처형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고 한다. 그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임을 당한 김득배를 위해 왕에게 요청하여 그 시신을 거둬 예로서 장사를 지냈다고 한다. 당시 학자인 이존오는 "나는 비로소 배움(학)과 행동(행)에 있어서 스승을 만났다."라고 높이 평가했다. 

술을 마시며


나그넷길 봄바람에 흥취가 마구 일어

좋은 곳 만날 때면 술잔을 기울이네

돌아갈 대 돈 다 쓴 것 부끄러워 마라

새로 지은 시 비단 주머니에 가득하니

절개를 지키고 뜻한 바를 위해 굽히지 않았던 인물로만 생각했는데 풍류를 상당히 즐겼던 사람이 포은 정몽주였다. 


"정몽주는 사람됨이 호방하고 시원하며 탁월한 데가 있어 그의 논설은 어떤 말이든지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 없다고 하며 동방이학의 조종으로 추대할만하다." - 목은 이색

임고서원을 한눈에 내려다보기 위해 위로 걸어서 올라가 본다. 포은관에 들어가서 보니 포은은 풍류와 술도 좋아했으며 다양한 시집을 남겼던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성리학의 시조, 충절의 표상, 단심 가등으로 부각되다 보니 그의 인간적인 면모는 많이 가려져 있었다. 

위로 올라와서 보니 그 모습이 볼만하다. 고려를 지탱했던 포은 정몽주를 기린 곳이기에 그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하늘의 별이 되어 만고의 충의지사로 빛나다." 

이곳은 선죽교를 재현해놓은 것이다. 옛 이름이 선지교인 선죽교는 개성시 선죽동 자남산 동쪽 기슭의 작은 개울에 있으며, 919년 고려 태조가 송도의 시가지를 정비할 때 하천정비의 일환으로 축조한 것이다. 한 사람이 철퇴를 맞아 죽게 됨으로써 잘 알려진 작은 돌다리다. 

하나의 왕조를 지탱함에 있어 왕보다 더 큰 의미가 있다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과연 지금 그런 인물이 있을까. 위화도 회군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낸 이성계 일파에게 가장 큰 산은 바로 정몽주였다. 그를 없애지 않고 고려라는 왕조를 무너트릴 수는 없었다. 

고려 말기의 충신 정몽주를 추모하기 위하여 1553년(명종 8)에 노수(盧遂), 김응생(金應生), 정윤량(鄭允良), 정거(鄭琚) 등 향내 유림들이 임고면 고천리 부래산(浮來山) 아래 창건을 한 이래  1919년 존영각을 건립하여 포은 선생의 영정만 모시고 향사를 지내오다 1965년에 다시 복원하여 위패를 모셨으며, 1980년에 보수 정화하였다. 

모든 것을 모아서 크게 이룬다는 뜻은, 음악 연주에 비유하면 금속 악기로 소리를 시작하고 옥으로 만든 악기로 소리를 끝내는 것과 같다고 한다. 조리를 시작하는 것은 지혜로움에 속하는 일이요, 지리를 끝내는 것은 성스러움에 속하는 일이다. 지혜로움은 기교이고, 성스러움은 힘이라고 한다. 어디까지 통달했는지 미루어 짐작하기는 쉽지 않지만 퇴계 이황이 가장 존경했던 사람이며 그가 있었기에 고려의 마지막은 의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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