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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Apr 17. 2019

금관가야

김해의 봉황대공원

수로왕이 세운 나라는 바로 전기 가야연맹의 맹주로 자리했던 금관가야다. 철기시대를 열었으며 평화의 시대를 열고자 했던 금관가야는 서쪽에 종주국이었던 백제와 신흥국가로 성장하던 신라 사이에서 교역의 중심지로 좋은 조건을 가졌을 뿐 아니라 강 유역이므로 농업이 발달했던 낙동강을 차지하려는 세력다툼에서 점차 그 세력을 잃어가기 시작한다.  532년(법흥왕 19)에 왕 김구해(金仇亥)가 왕비와 세 아들을 데리고 신라에 항복함으로써 완전히 멸망했는데 친 신라 입장을 취했기에 금관가야 왕실의 후손은 신라의 진골귀족으로 편입되어 신김씨계(新金氏系)를 형성하게 된다. 구해왕의 아들이었던 무력은 백제와의 싸움에서 큰 공을 세워 벼슬이 각간까지 올랐는데  그 아들이 김서현(舒玄)이다. 성골인 당시 신라왕은 김서현을 교착상태였던 진천으로 보낸다.

김서현의 아들인 김유신은 훗날 삼국통일의 주역으로 성장하고 김유신은 정치적인 입지가 높아지면서 무열왕의 셋째 딸인 지소와 혼인했다. 김해시를 대표하는 공원으로 봉황대 유적지를 기반으로 한 봉황대공원이 있다. 마치 일본의 한 여행지를 보는 것처럼 잘 조성되고 짜 맞추어진 곳이다.

봉황역부터 수로왕릉 역까지 해반천 우측 편으로 봉황대공원이 조성되어 있으며, 해반천을 건널 수 있도록 육교 및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어 있다. 김해시는 2018년 6월 프랑스 미헝드에서 열린 국제 슬로시티 연맹 총회에서 슬로시티 가입 인증을 받고 같은 해 11월 선포식을 연 바 있는데 슬로시티 여행에서 봉황대공원은 꼭 추천을 해본다.

설화가 숨 쉬는 왕도를 걷다 보면 봉황유적지와 수로왕릉, 가야의 거리 구지봉공원, 해반천과 연지공원까지 이어진다. 위쪽으로 가면 황새장군과 여의낭자의 사랑이야기가 설화로 남아있는 황새바위와 여의각을 만날 수 있다.

녹음이 가득한 봉황대 유적지는 금관가야시대 사람들의 생활유적지로 이 이름은 구릉의 생김새가 봉황이 날개를 펼친 모양과 같다 해서 붙여진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왕궁터 발굴지를 시작으로 한가로이 봉황대 돌계단을 밟아 오르면 길 양편으로 생명의 기운이 피어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번 김해를 탐하는 여행에서 김해시가 자신 있게 추천하는 여행지 연지공원, 가야 테마파크, 봉황대 유적지, 수로왕비릉과 구지봉, 대청천, 국립 김해박물관, 낙동강 레일파크, 가야문화축제의 대부분을 방문해 보았다. 무척이나 빡센 일정으로 열심히 돌아다녔다.

부산이라는 관광도시에 인접해 있으면서도 비교적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은 김해시는 금관가야를 상징하는 도시다. 새와 관련한 건국 설화중에 가야만한 곳도 없다. 김해지역의 9간(九干)이 구지봉(龜旨峰)에서 하늘에서 내려온 6개의 알을 수습하여 집에 가져오니 모두 사람이 되었다. 그중에 한 사람이 김수로왕인 것이다.

 금관가야는 본래 구야(狗邪)·가락(駕洛: 伽落)·가야라고 불렸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 고령지역에는 대가야가 있었는데 6알에서 태어난 나머지 다섯 사람도 모두 돌아가 5 가야의 임금이 되었다고 하는데 그중 한 사람이다.  낙동강 하류의 삼각주 지역에 자리 잡아 농업이 발달하였는데 가야국들은 대부분 낙동강 젖줄을 배경으로 발전을 했다. 조성된 역사는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봉황대공원은 김해시를 아우를 수 있는 대표적인 공원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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