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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Apr 18. 2019

정치학

김해 봉하마을을 찾아서 

누군가에게는 부엉이가 행운의 상징이지만 누군가에게는 부엉이의 울음소리가 구슬프게만 들린다. 2009년 5월 23일은 휴일로 시험감독을 하고 있을 때였다. 모든 방송과 사이트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투신을 다루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투신을 한 봉하마을의 바위의 이름은 부엉이 바위다.  옛날 봉화산에 부엉이가 많이 살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 부엉이 바위가 있는 곳에는 사자바위도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을 생각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이 생각난다. 국회의원들 중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을 제대로 읽고 이해한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아리스토텔레스는  올바른 국가 형태로 단독자가 지배하는 ‘왕제(basileia)’와 소수의 유능한 자가 지배하는 ‘귀족제(aristokratia)’, 다수가 정치에 참여하는 ‘폴리티아(politeia)’를 꼽고 있다. 그리고 국가의 타락 형태를  참주제(tyrannis)와 과두제(origarchia), 민주제(dēmokratia)를 거론했는데  참주제는 독재자 한 사람의 이익을, 과두제는 부자의 이익을, 민주제는 가난한 사람들의 이익만을 추구하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수천 년 전의 사상가가 오늘날의 정치문제를 관통해보고 있다. 

김해의 봉하마을은 노무현 전 대통령 때문이 아니더라도 여행지로 참 괜찮은 곳이다. 말 그대로 스쳐가는 풍경 속에 고요한 느낌과 함께 여행의 추억을 남겨줄 만한 곳이다. 자전거를 즐겨 타던 노무현 전 대통령으로 인해 이곳은 자전거길로 많은 방문객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장기적으로 보면 부유한 나라가 강한 것이 아니라 분열의 위기를 극복하여 통합하고 재건하는 나라가 강한 것이다. 한국의 근본적인 문제를 보면 1,600년대의 베네치아 공화국으로 돌아가 보면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호황으로 국가가 부유해지던 베네치아는 결국 역사가들이 말하는 타락의 시대에 직면했다. 귀족과 상인들은 비즈니스 확장이나 신제품 개발보다 토지를 임대해서 농부들을 착취하는 데 열중했다. 그로 인해 정직한 노동을 통해 돈을 벌려는 의지와 능력을 지닌 사람들은 사라지고 천박한 놀이와 유흥과 도박의 공간으로 전락해버렸다. 사람들이 자극적인 일에만 휩쓸리게 된 것이다. 최근 한국과 비슷하지 않은가?

봉하마을은 노무현 대통령 생가와 노무현 대통령 사저를 시작으로 대통령 기념관, 여민정, 안마당, 거울못, 잔디동산, 벼리채, 당신의 연못, 채원, 수생식물원 등이 자리하고 있다. 이곳에서 태어나고 이곳에서 묻혔으며 임기를 마친 뒤 귀향하여 농민들과 함께 살면서 생태농법을 실천하였다. 이곳의 이름은 '사람 사는 들녘'이다.


"흙길 따라 풀, 꽃, 나무를 함께 보면서 새소리 벌레소리 들으면서 길을 걷는 삶, 그것이 국민들의 복지다."

노무현 대통령은 유언을 남겼는데 자신이 세상을 떠나면 "집 가까운 곳에 아주 작은 비석 하나만 남겨라."였다. 사람 사는 세상이 형상화된 곳이며 국민참여 묘역인 이곳은 대한민국 제1호 국가보존묘지'다. 


앞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민주제가 가난한 사람들의 이익만을 추구할 때 타락한다고 이야기했던가. 사회적 분열은 기존 근로자들이 새로운 근로자들의 진입을 차단할 때 시작된다. 베네치아에서도 길드나 노동조합은 자라나는 세대가 아니라 연장자들이나 이미 자리를 잡은 근로자들의 권리 보호에 집중하는데 이는 젊은이들의 노동의 기회를 박탈하였다. 

노무현 대통령의 생가로 들어가 본다. 소박한 집이다. 이곳에서 태어나 정치에 입문하여 대통령에까지 올라갔던 노무현 대통령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도 여러 개가 개봉하였다. 다큐멘터리 영화 ‘무현, 두 도시 이야기’(2016), ‘노무현입니다’(2017), 최근 5월에 개봉을 확정한 자연 다큐멘터리 영화 '물의 기억'은 故 노무현 대통령이 꿈꿨던 미래와 봉하 마을의 아름다운 사계절을 전지적 현미경 시점에서 담은 초밀착 친환경 다큐멘터리 영화라고 한다. 

자연을 직접 볼 수 있는 곳에서 태어났기 때문일까. 변호사, 국회의원, 대통령이면서 깨어있는 세상을 바랐던 사람 노무현은 참여에 대해서 이야기를 많이 했다. 역사는 사람이 만드는 것이라고, 주권자는 우리라고 말이다. 

정치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국가의 임무를 다하기 위해서는 ‘고귀함’을 목표로 삼는 덕망 있는 사람들, 곧 ‘최고선의 인간들(아리스토이)’이 거기에 가장 적합하다고 보았다. 마음가짐부터 노블레스 한 사람이 정치를 해야 한다고 했지만 아직도 그 길은 이상적인 국가 형태에 불과한 듯하다. 우리는 ‘윤리학’과 ‘정치학’이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다고 볼 수 있을까. 최고선이라는 탁월한 윤리적 이념을 실현할 수 있을까. 

위대한 대왕으로 지금까지 불려지고 있는 알렉산드로스의 비결은 지적인 성취에 있었다고 한다. 우리는 과거를 잊지 않고 가슴에 새겨야 한다. 알렉산드로스의 지적인 성취는 역사 공부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한다. 멀지 않은 과거지만 우리는 역사로 기억을 할 때가 올 것이다. 후계자가 누구인지 묻는 질문에 알렉산드로스는 마지막으로 이런 말을 남겼다. " Toi Kratistoi(가장 강한 자)."


"다음 세기까지 살아남을 만큼 내적으로, 외적으로 강력한 국가는 어디인가?"

이곳에서 잠시 묵념을 올려본다. 바람에 휘날리는 태극기가 유독 진하게 느껴진다. 수묵화로 이곳을 그려내도 괜찮을 듯하다. 먹은 모든 것을 태워서 검게 남는 불의 성질을 가졌지만 물과 만나면서 자신을 소멸하면서 생성을 그려낸다. 소크라테스는 성찰 없는 삶은 살아갈 가치가 없다고 가르쳤다. 인간은 심리적 안정을 위해 희망을 보고 때론 신화를 원한다. 노무현 대통령을 원했던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과 비슷한 환경에서 자라난 사람이 대통령의 자리에 올라가서 함께 행복해지는 신화를 바랐을지 모른다. 

진보는 화려하면서 동시에 고통스럽다. 기술의 변화, 시대의 변화, 생각의 변화가 지속적으로 있어왔다. 변화가 있어야 할 때는 마땅히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도 택시연합회와 우버 등의 충돌이 있었다. 우버의 운전자들은 평가받으며 서비스를 제공할 수 없기에 친절하게 인사하고 때론 생수까지 제공한다. 과연 그와 같은 고객들의 엄중한 평가에 택시운전사들은 면허증의 운명을 맡기려 할까. 국민 모두가 균형 있는 정치를 위해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고 수용할 것은 수용할 필요성이 있다. 


이불 밖은 위험했던 겨울이 가고 이제 여름이라고 할 정도로 따뜻한 봄이 왔다. 봉화산에 부엉이가 많이 살게 된 것은 커다란 바위가 두 개가 있기 때문이다. 부엉이는 둥지를 짓지 않고 바위틈에 알을 낳아 기르는 생태학적 특성 때문이다. 풍요를 상징하는 새이지만 그 생활은 오히려 검소하니 그래서 더 매력적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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