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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Apr 23. 2019

고요한 공간

구미 동락 신나루

다리가 만들어지기 전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배로 이 강을 건너갔을까. 지금이야 공업도시로서 구미가 잘 알려져 있지만 낙동강이 가로지르며 흘러가는 구미시는 물류도시로서의 역할을 했다. 구미시에는 동락의 신나루뿐만이 아니라 무려 22개의 나루터가 있었던 곳이다. 즉 나루터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을 것이라고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 철도가 부설되면서 낙동강의 나루터는 필요가 없어지면서 쇠퇴되었으며 대교들이 들어서면서 완전히 사라졌다. 

구미 동락 신나루는 잊혀가는 나루 문화를 기억하기 위해 2015년 4월 동락공원 일대에 신나루 문화벨트 사업을 완료하고 데크길 조성 등을 통해 강변관광문화로 자리 잡도록 만들어 두었다. 구미를 여러 번 와봐서 알지만 나루를 중심으로 구미와 선산의 문화가 발전해 왔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동락 신나루가 있던 곳에는 동락이라는 지명을 그대로 사용한 동락서원도 있다.  1676년(숙종 2)에 ‘동락’이라고 사액되어 사액서원으로 승격되었는데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경덕사(景德祠), 6칸의 중정당(中正堂), 각 3칸의 동재(東齋)와 서재(西齋), 신문(神門), 3칸의 문루(門樓), 4칸의 고사(庫舍) 등이 있다. 동락서원에 모신 여헌 장현광(張顯光·1554년 ~ 1637년 9월 7일)은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 힘을 썼다. 류성룡(柳成龍) 등의 천거로 여러 차례 내외의 관직을 받았으나, 대부분 사퇴하였다. 

이곳에서 찍은 사진을 지인에게 보냈는데 평화로워서 좋았다고 한다. 동락서원과 동락 나루터는 여헌이 생각했던 학풍과 맞아떨어진다. 그는 온 세상의 만물이 생겨나는 근원을 이르는 태극을 내세우되 일체유(一體儒)와 그 근원을 대답을 기다리는 것과 조화의 논리로 융화 종합하는 철학적인 길을 추구하였다. 

구미대교가 놓인 것은 지난 1975년이다. 동락 나루터는 구미의 3대 나루터에 들어가지는 않는다. 예로부터 구미의 3대 나루터는 강정나루, 강창나루, 비산나루가 3대 나루터다. 낙동강을 중심으로 발달한 구미는  1995년 선산군과 통합되어 새로운 도농 통합형태의 구미시가 되었다.

나루터를 진(津)이라고도 부른다. 대전의 신탄진은 나루터가 있던 곳이라고 해서 신탄의 진이라는 의미의 지명이다. 조금 규모가 크고 그 역할이 많으면 도가 붙는다. 압록강변의 압록도(鴨綠渡)와 예성강변의 벽란도(碧瀾渡), 임진강변의 임진도(臨津渡)·장단도(長湍渡)등이 대표적인 도다. 인조가 청나라에 나아가서 굴욕을 겪은 곳이 삼전도(三田渡)이며 수산물로 유명한 서울의 노량진(鷺梁津)이 대표적인 나루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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