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리적인 대안이 없는 한국
모든 살인사건이 정신과 질환인 조현병에 의해서 발생되는 것이 아닐 것인데 우리 언론은 과대 확대 생산을 하고 있다. 특히 보수언론이라고 하는 신문사들은 심각한 일부의 범죄를 전체적으로 확대하며 막을 수 있었던 것처럼 과거를 재조명한다. 문제의 본질을 찾아가는 기사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한국사회에서 정신병으로 인한 치료를 지속적으로 받는다는 것은 정상적인 사회활동을 포기하는 것과 비슷하다. 즉 범죄자는 아니었지만 잠재적으로 위험한 범죄자와 유사한 취급을 받기에 제약을 받게 된다. 이런 사회 현실에서 스스로 정신병을 치료받고자 나서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수년 전부터 올해까지 일어난 유사한 살인사건이 일어난 공간은 대부분 서민들이 사는 곳이었다. 나름 생활수준이 되는 공간에서 사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우월하다는 착각에서 벌어진 일탈로 문제가 생긴다면 서민들은 무지해서 문제가 있다는 사실조차 인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가정 안에서 벌어지는 폭력은 조현병의 씨앗을 키우는 경우가 많다.
유아, 소아, 아동, 청소년기 폭력에 노출이 되면 그 상처는 영구적으로 그 사람에게 흔적을 남기게 된다. 특히 가정에서 폭력이 일상화되었다던가 인성을 말살시킬 정도로 압박이 심해지면 성인이 되더라도 스스로 상처를 치유하지 못한 채 살게 된다. 이것이 심해지면 최근에 조현병 사건처럼 불거지기도 한다. 사회에 적응해서 살더라도 특정 집착을 가지고 살게 되는 경우가 많다.
돈에 대한 집착, 이성에 대한 집착 등이 과도하게 자신을 잠식하면서 주변을 힘들게 하는 경우가 많다. 성인이 되어서 받는 폭력에 의한 정신적인 충격은 외부 폭력이 사라지고 나면 피부에 생채기나 어느 정도 치유가 가능한 상처가 될 수도 있지만 어릴 때 받은 폭력에 의한 정신적인 충격은 꼭 필요한 장기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히는 것과 비슷하다. 그 결과는 적합하지 않은 대체장기를 사용함으로써 생기는 부작용처럼 삶에 문제를 지속적으로 발생시킨다.
물론 꼭 필요한 장기를 스스로 만들어내는 긍정적인 돌연변이가 있을 수 있다. 게다가 정상적인 가정에서 자라난 사람보다 더 진취적으로 살기도 한다. 그런 경우는 상당히 드물다. 아주 희소한 비율로 있을 수 있지만 거의 없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 상황에서 자라난 사람들의 공통점은 피해망상이 있다는 점이다. 피해망상의 정도에 따라 다르지만 그것이 심해지면 폭력적인 성향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물론 약물 등을 사용해 지속적으로 치료를 하면 문제가 생기지 않을 수가 있다.
가정폭력을 단순히 옛날 사람들은 그러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사람에 따라 차이가 있을 뿐이고 유서 깊은 집안에서는 그런 폭력으로 아이들을 기르지 않는다. 옛사람이라고 치부해버리려면 사서삼경 정도는 알아야 하지 않을까. 사서삼경은 단순히 고루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 속에는 지금뿐만이 아니라 미래에도 유효한 지혜가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집의 교육환경이 좋지 않아서 그런 책들을 읽지 못했다고 치자. 커서는 충분히 자신의 의지에 따라 접할 수 있다. 배움이라는 것에 대한 열망이 없으면서 그 가치를 인지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뿐이다. 그러고 나서 아주 좁은 시야에 갇혀서 단순히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조언을 한다.
이 사회는 정신적인 가치보다 물질적인 것을 더 가치가 있다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그런 물질적인 것에 가려 곪은 상처들은 언제든지 문제 발생의 여지를 가지게 된다. 다소 불편한 이야기가 될 수도 있지만 가정을 가질 자격이 없는 많은 사람들이 가정을 가지고 폭력을 일반화시키기도 한다. 사회가 공동적으로 져야 할 책임을 개개인에게 지우는 것은 무책임한 것이다. 사건이 생기고 나서야 가해자에 대한 형벌에 대한 것만 논하는 것을 보면서 선진국 초입에 들어섰다는 대한민국의 민낯이 아닐까란 생각이 든다.
나이만 먹었을 뿐 정신적인 것은 전혀 채워지지 않은 성인은 쉽게 조언을 해서는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