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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Apr 30. 2019

눈에 뜨였다.

괴산 원풍리 마애이불병좌상

문경에서 괴산으로 넘어가는 길목에서 마치 무언가를 발견한 것처럼 눈에 뜨인 석불이 있었다. 보통은 바위에 새긴 불상의 경우 홀로 있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 불상은 두 분의 화불뿐만이 아니라 머리 위로는 세 분의 화불까지 다섯 분이 자리하고 있다. 두 분의 불상을 같이 모신 이불병좌상(二佛竝坐像)은 노부부를 새긴 듯 푸근하면서도 불상의 특징이 돋보인다. 혼자가 아니라 서로를 보완하듯이 같이 앉아서 민중을 내려다보고 있다. 

마애불좌상은 국도변에 자리하고 있지만 이곳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은지 주차장도 따로 조성이 되어 있다. 산속에 있는 석불이 아니라서 접근성은 상당히 좋은 편이다. 차를 세우고 조금만 걸어서 올라가면 마애불좌상을 만나볼 수 있다.  괴산의 보물인 이불병좌상은 묘법연화경 견보탑품에 보이는 석가여래상주설법과 다보여래상주증명을 표현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화령 길가 상당히 높은 곳에 감실을 만들어 두 분의 불상을 같이 모신 경우는 금동불등에서 종종 볼 수 있는 형식이기는 하나 이처럼 자연과 맞닿은 곳에 돌에 새긴 경우는 상당히 드물다. 고려 초나 늦어도 12세기경에 조성한 마애불로 보고 있다. 

전체적인 구도로 봐서는 결가부좌를 한 듯하고 양손은 법의에 가려져 있는데 시간이 지나 많이 풍화된 모습이다.  넓적하며 평면적인 불상의 얼굴에는 가는 눈, 뭉툭한 코, 꽉 다문 입 등이 특징이다. 

직접 가까이 가서 보니 상당히 건장하면서도 넓은 어깨와 굵은 팔은 강인해 보이는 인상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석불의 형태는 고대 인도에서는 나타나지 않았지만 변화는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가 BC 4C에  제국을 만들기 위해 서방으로 나아가면서 지중해에서 인도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성립된 당시로서는 최대의 제국 페르시아를 정복하면서 시작되었다. 힌두쿠시 산맥을 넘어 인도로 진격했는데 인도에서도 연전연승이 계속되었다. 이때 그리스 문화가 인도로 스며들게 된다. 

그리스 문화는 불교의 발상지인 인도의 많은 것을 바꾸었다. 불과 100년이 안된 기원전 3세기경에 자연석에 부처님을 새겨서 모시는 문화가 시작되었다. 불교의 전래 경로에 따라 중국에도 낙산대불(71m)을 비롯한 수많은 마애불을 남겼는데 이후로 백제시대, 통일신라, 고려시대에 많은 석불이 조성되었다. 

괴산의  이불병좌상(二佛竝坐像)을 보았다면 바로 앞에 있는 자연 풍광을 벗 삼아 사색에 잠겨보아도 좋다. 6세기 중국에서는 법화경을 소의 경전으로 하는 석가 다보의 이불병좌 이외에 두 부처를 함께 조성하는 雙身像이 출현하여 유행하였다고 한다. 병립한 두 불상은 정치적 성격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설도 있지만 필자는 정치적인 것보다 균형 있는 미래를 꿈꾸는 바람이 반영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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