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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May 01. 2019

고종 환궁

고종 환궁을 원했던 허위 생가터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들 손에 살해된 ‘을미사변’ 이후 신변에 위협을 느끼던 고종은 1896년 2월 11일 세자와 함께 여장으로 변복을 하고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였다. 이것이 바로 아라사(러시아)로 피신한 아관파천(俄館播遷) 사건이다. 고종은 이듬해 2월 25일까지 여기 머물며 김홍집 등 이른바 ‘을미사적’을 잡아 죽이라 하고 단발령을 철회하는 등 왕권을 행사했다. 그 사이 나라꼴은 엉망이 되고 말았다. 이후 환궁을 했으나 유사시 안전을 보호받기 쉽도록, 경복궁이 아닌 외국 공사관이 주변에 몰려 있는 경운궁(덕수궁)으로 돌아왔으니 온전한 의미의 환궁도 아니었다.

고종의 환궁을 추진했던 사람 중에 왕산 허위라는 사람이 있었다. 1855년 4월 2일(음력) 경북 선산군(善山郡) 구미면(龜尾面) 임은리(林隱里, 현 구미시 임은동)에서 아버지 청추헌(聽秋軒) 허조(許祚)와 어머니 정부인(貞夫人) 진성이씨(眞城李氏) 사이에서 허훈(許薰), 허신(許藎), 허겸(許蒹)에 이어 4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는데 이곳이 바로 그의 생가터이다. 

1890년경 고향인 선산 임은을 떠나 진보의 신한(新漢)으로 이주하여 전장(田莊)을 관리하면서 실학에 대해 관심을 기울였다고 한다. 왕산 허위는 1894년 맏형인 허훈과 함께 동학농민군을 피하여 피난생활도 했지만 1895년 명성왕후가 시해되고 나서 이듬해 전국 각처에서 의병이 봉기할 때 그는 조동석(趙東奭) ・ 이기찬(李起燦) ・ 강무형(姜懋馨) 등 상주와 선산지역의 유생들을 규합하여 창의를 준비하였다. 

왕산 허위는 의병활동을 하면서 조선 말기에 많은 활동을 한다. 1907년 7월 19일 고종의 퇴위가 있고 7월 31일 군대해산 등 일련의 망국 사태가 이어지자 그는 1907년 9월 경기도 연천(漣川) ・ 적성(積城) 일원에서 창의 하였다.  1907년 7월 고종으로부터 비밀리에 ‘기의(起義)’하라는 의대조(衣帶詔)도 받은 허위는 1908년 1월 초 총대장 이인영과 함께 그는 연합의병부대를 지휘하여 서울을 향해 진군령(進軍令)을 내렸으나 일본군에 의해 막혔으나 다시 정비하여 의병부대들의 전열이 어느 정도 정비되자 ‘제2차 서울 탈환작전’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1908년 6월 11일에 체포되었고 같은 해 9월 18일 사형을 선고받았으며 1908년 10월 21일 오전 10시 서대문형무소에서 형이 집행되어 순국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 54세였다고 한다.

“국가의 부끄러움과 백성의 치욕이 이에 이르렀으니 죽지 않고 어이 하리오, 아버지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나라의 주권도 회복하지 못했으니, 불충 불효한 몸이 죽은들 어찌 눈을 감으리오” - 허위의 유시(遺詩)


허위가 주장했던 고종의 환궁을 있던 해에  우리 의사와 무관하게 조선의 분할론이 처음 거론되었다.  조선은 무주공산(無主空山)였으며 백성은 ‘면허받은 흡혈귀’인 탐관오리들에 시달려야 했다. 어지러운 시기에 구미 선산의 허위 가문은 대대로 쌓아 올린 명문의 전통과 영화를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 민족을 위해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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