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의 으뜸 서원이라는 도남서원
세상에서 가장 믿어서는 안 되는 사람의 유형은 자기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다.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것은 자신과의 약속을 어기는 것을 물론 타인과의 약속도 아무렇지 않게 어긴다. 자신이 약속을 지킬 수 있을지도 모르는 상태로 자기 스스로를 그냥 모르고 있는 것이다. 자신을 모를 수도 있지만 모르는 상태에서 나아가서는 안된다. 스스로를 잘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만이다. 영원히 자신을 알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삶의 목적이다.
강을 바라보는 위치에 자리하고 있는 도남서원은 그 규모가 남다르다. 영남의 으뜸 서원이라고 불릴만한 곳이다. 이곳은 1606년(선조 39) 지방유림의 공의로 정몽주(鄭夢周)·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으며 1616년(광해군 8) 노수신(盧守愼)·유성룡(柳成龍), 1635년(인조 13) 정경세(鄭經世)를 추가 배향하였다.
도남서원의 안쪽으로 들어와 본다. 때 이른 더위로 인해 무척이나 덥게 느껴지는 온도다. 경내의 건물로는 묘우인 도정사(道正祠), 동재인 손학재(遜學齋), 서재인 민구재(敏求齋), 신문(神門)인 입덕문(入德門), 강당인 일관당(一貫堂), 누각인 정허헌(靜虛軒)과 풍우단(風雩壇)·영귀문(詠歸門) 등이 남아 있다.
옛사람의 좋은 이야기를 이상하게 해석하면 왜곡되게 된다. 예를 들어 옛사람의 광기는 자유분방한 깨달음으로 나아감이었지만 지금의 광기는 방탕한 유흥으로 변하였고 옛사람의 긍지는 청렴 강직이었는데 지금 사람은 앞뒤가 꽉 막힌 고집불통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옛사람의 어리석음은 솔직함이었으나 지금은 속이려 들기만 할 뿐이다.
도남서원은 강을 바라보고 있어서 그런지 몰라도 마치 정자와 같은 느낌이 드는 곳이다. 처마의 밑에 가서 쉬어도 좋고 강당에 올라가서 잠시 쉬어도 좋다. 오픈된 공간이어서 언제든지 찾아와도 좋다.
도남서원이라고 현판에 쓰여 있는 건물로 나아가 본다. 도남(道南)’이란, 북송의 정자가 제자 양시를 고향으로 보낼 때, “우리의 도가 장차 남방에서 행해지리라” 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동학이 일어나고 민심이 동학으로 쏠리자 그에 극도로 반대한 세력이 바로 유생들이었고 그들은 조직적인 배척운동을 벌였는데 그 시발이 바로 상주지역이기도 했다.
조선의 유학 전통은 바로 영남에 있다는 자부심에서 이 서원은 탄생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한국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일에 관여하는 것을 이상하게 좋아한다. 그렇지만 자신이 당사자라고 느껴지지 않은 일이라면 그 일에 머리를 들이밀어서 뭔가 하지 않는 것이 후환이 없다. 그냥 옛것을 보면서 깨달음을 접하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경상도는 본래 유자(儒者, 선비)가 많기로 이름나서 상도(上道, 경상좌도, 특히 경북 북부)에는 이황이 있어 학문을 숭상하였고(學問相尙), 하도(下道, 경상우도, 특히 경남 서부)에는 조식이 있어 절의를 높였기 때문에(節義相高) 풍속이 특징이었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을 천거하고 많은 활동을 했던 류성룡이 도남서원에 모셔져 있다. 류성룡은 1580년 윤5월부터 1581년 1월까지 약 여덟 달 동안 상주목사로 재임하면서 유학 진흥에 많은 힘을 쏟고, 그 과정에서 다수의 제자들을 길러내었다.
자신을 스스로 아는 것만 잘해도 인생의 대부분은 성공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