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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May 01. 2019

경의를 바쳐야 할 일

김시민 장군을 모신 괴산 충민사

군자는 세 가지 일에 경의를 바친다고 한다. 천명에 경의를 바치고, 훌륭한 사람에게 경의를 바치고, 성인의 말에 경의를 바친다. 소인은 천명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경의를 바치지 않고, 훌륭한 사람에게 무람없이 하고, 성인의 말을 업신여긴다. 임진왜란 당시 천명에 경의를 바쳤던 사람이 여럿 있었지만 대표적인 사람으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있고 다른 한 사람은 충무공 김시민 장군이다. 

충북 괴산군 괴산읍 능촌리에는 김시민 장군 충민사는 임진왜란 때 전공을 세운 충무공(忠武公) 김시민(金時敏)과 문숙공 (文肅公) 김제갑(金悌甲)의 위패를 봉안하고 제향 하는 사당인 충민사가 있다. 김시민은 진주 충렬사에 제향 되었으나 고종 3년(1866) 훼철되어 김제갑의 충열사에 합사 하였는데 1976년 묘소를 이 곳으로 옮기고 충민사를 세웠다. 

김시민 장군은 천안에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김시민 장군이 태어났다는 출생지가 있지만 건물은 없는 상태다. 

충민사의 앞을 흐르는 강은 달천이다.  달천강(達川江)·달천천(達川川)·다네·달강(達江)·감천 등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속리산의 비로봉(毘蘆峰:1,021m) 서쪽 계곡에서 발원하여 보은군 내북면, 괴산군 청천면·괴산읍, 충주시 달천동 일대를 지나간다. 이 강은 과거 물맛이 좋아 '단냇물', '달냇물'로 불렸으며 수달이 많아 '달강'이라 했다고 하는데, 현재에도 인근에 수달피 고개가 있으며 달천리 서쪽 물가를 '물개달래'라고 부르고 있다. 

이 강물이 얼마나 달달한지는 마셔보지는 못했지만 우선 충민사를 보기 위해 충무교를 건너가 본다. 충무교 앞에는 천명을 지키기 위해 살았던 김시민 장군을 기리는 곳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홍살문이 세워져 있다. 

김시민 장군은 1591년 진주 판관에 임명되었고,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난 뒤 목사 이경(李璥)이 병사하자 그 직을 대리하면서 군사를 편성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사천에 집결하여 진주로 향하려 하자, 곤양 군수 이광악(李光岳), 의병장 이달(李達)·곽재우(郭再祐) 등과 합세하여 적을 격파하고 고성·창원 등을 회복했다. 이것이 1차 진주성 전투다. 

충무공 김시민 장군의 시호는 충무다. 1604년 선무공신 2등에 추록되고, 그 뒤 영의정에 추증되고 상락 부원군에 추봉 되었다. 김시민 장군은 진주성에서 2차 전투가 일어나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 후임이었던  당시 진주목사 서예원(徐禮元)은 원병으로 와있던 명나라 장수를 접대하다가 급히 전투에 참가하느라 진주성을 지휘할 채비를 갖추지 못하였다.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주민들도 시가전을 펼쳤으나 이튿날에는 결국은 성이 함락되고 말았다. 성이 함락되자 왜군은 성안에 남은 군·관·민 6만 명을 사창(司倉)의 창고에 몰아넣고 모두 불태워 학살하였을 뿐만 아니라 가축도 모두 도살하였다고 한다.

괴산 충민사에는  현대에 건립한 신도비 2기가 있는데 왼쪽은 제액(題額)이 ‘김충무공 신도비명(金忠武公神道碑銘)’으로 김시민의 것이다. 괴산 충민사에는  외삼문으로 효충문(效忠門)이 있고 내삼문인 선무문(宣武門), 김시민장군 유적정화기념비(金時敏將軍遺蹟淨化紀念碑),  정면 3칸과 옆면 2칸의 팔작지붕 목조기와집인 충민사와 김시민장군 묘소,  묘역 전체의 오른쪽에는 구사당도 함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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