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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강칠현(洛江七賢)

일곱 가문이 교유하고 함께하다.

정말 좋은 친구를 만난다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가 않다. 배운 것이 많을수록 깨달음이 클수록 더 깊은 교류를 할 수 있지만 현대에서 그런 배움보다는 금전적인 것이나 일상생활 외에 관심이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최근 지인 아버지의 장례식장을 다녀왔는데 친구와 후배들을 대화 주제를 보면 관심은 오로지 돈벌이에만 있다는 것을 보면서 생각했던 이슈를 끄집어낼 수가 없었다. 지금 삶에 집중하는 것보다 더 가치가 있는 것이 과연 돈일까. 어떻게 보면 무척이나 유치한 대화 주제를 계속하는 것을 보면서 끝에 한 마디 거들었다.


"아~ 의미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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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의 끝자락에 가면 고령에 살면서 학문에 힘쓰며 서로 교유하다가 전시에는 분연히 나라를 위해 힘을 쏟은 낙강 칠현의 흔적이 있는데 1589년 5월에 교유하던 선비들의 모임이 400여 년의 시간을 지나 아직까지 후손들의 모임으로 연결되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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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강 칠현(洛江七賢)이라고 쓰인 시비(詩碑)에는 낙동강 유역에서 서로 교유하던 7분의 현인이 이곳 사망정에 모였다가 강정에서 개포까지 뱃놀이를 하면서 읊은 시를 쓰여 있다. 만경창파 욕 모천(萬頃蒼波欲暮天·넓고 푸른 물결과 저물어 가는 하늘)이라는 시제로 한 명씩 시를 썼다. 성산인 옥산(玉山) 이기춘(李起春), 완산인 청휘당(晴暉堂) 이승(李承), 광산인 모재(茅齋) 이홍우(李弘宇), 청주인 한강(寒崗) 정구(鄭逑), 고령인 송암(松菴) 김면(金沔), 밀양인 대암(大庵) 박성(朴惺), 광산인 육일헌(六一軒) 이홍량(李弘量) 선생이 썼다고 한다. 이중 고령 김면장군은 유적지도 남아 있어 그 흔적을 찾아가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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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가문의 자제들은 높은 학문을 가진 분들로 서로 흠모하며 교유하면서 살았다고 한다. 이곳에는 벼슬을 마다하고 산중 처사를 자처한 광산이 씨 육일헌공의 유적비와 공의 자제들인 슬곡 양촌의 유적비, 또 공의 손자 농암공 유적비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삼일운동 100주년을 맞아 의미가 더 있어지는 파리장서 사건에 서명하신 애국지사 만회 이병회(李柄回) 선생 비석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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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에는 일곱 가문의 이들이 모두들 분연히 일어섰다. 이홍량은 거창에서 지역민과 화살촉을 만들어 김면에게 공급하다가 임진년 11월에 세상을 떴으며 김면은 의병대장으로 활약하다가 진중에서 숨지고 이기춘은 김면의 진중에 백의종군하였으며 박성은 학봉 김성일의 막료로 전력분투했다고 한다. 모재 이홍우는 의병을 일으켰고 청휘당 이승은 왜란을 맞아 사재를 털어 무기와 군량을 확보하여 고령의 왜적을 격퇴하였다. 정구는 왜란 시 통천 군수로 있으며 둔전(屯田)을 경작하여 군량미를 비축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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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맞는 이와 교유한다는 것은 참 의미가 있다. 경상감사 김성일은 장계를 올려 “김면은 본래 병이 잦아 산림에서 치유했는데 왜란이 일어나자 분기를 내 몸을 돌보지 않고 의병을 일으켰다…”고 추모했다. 선조는 김면을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로 추증하였다고 한다. 이곳에 있는 시 7편은 당시는 물론이고 뒷날까지 회자된다. 그것은 시가 뛰어나기도 하지만 시를 지은 7명 모두 덕망과 문필로 존경을 받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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