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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벽동 지석묘

사천의 대표 청동기 흔적

최근에 옛날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언급되어서 그런지 옛사람의 흔적을 찾아가는 길이 새롭게 다가왔다. 30년쯤 세월을 겪었으면 옛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50년쯤 더 세월을 겪으면 옛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굳이 지구의 역사를 언급하지 않아도 문명시대가 시작되고 나서 인간의 수명은 찰나에 불과하다. 찰나에 불과한 시간이기에 최선을 다해 나이에 관계없이 평생 배움을 청하는 것은 지성을 가진 존재로서 해야 할 역할이다. 사천에 있는 신벽동에 가면 청동기시대의 흔적인 지석묘가 있다. 내비게이션에 나와있지만 이곳으로 가는 길은 생각보다 눈에 잘 뜨이지 않아서 지나치기 십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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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서 보면 상록수가 심어져 있는 곳에 큰 돌이 흩어져 있는데 저곳이 바로 신벽동 지석묘다. 지석묘는 흔하게 고인돌이라고 말하는 청동기 시대의 무덤이다. 고인돌은 청동기시대에 성행하여 초기철기시대까지 존속한 거석문화(巨石文化)의 일종이기도 하다. 형태는 지상에 윗돌[上石]과 받침돌이 높이 올라와 있어 마치 탁자형(卓子形)으로 된 형상, 둘은 지면에서 낮게 4∼5개의 받침돌로 윗돌을 고여 마치 바둑판형으로 보이는 형상, 셋은 지면에 받침돌이 없이 큰 돌(윗돌)만을 지면에 바로 놓은 형상 등 3종류가 일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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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에 있는 지석묘 혹은 고인돌을 보면 그 시대의 사람들은 어떤 생각으로 이런 형태를 만들었을까라는 생각과 동시에 거석문화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보는 것이 맞는 것인가라는 생각도 든다. 무게가 많이 나가는 이런 돌을 어딘가에서 구해 가져오는 것은 그만큼 집단의 힘이 있었다고 과시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고대국가 성립 이전의 소국(小國: 현재의 郡 정도의 면적) 상태로부터 시작되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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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들은 당연히 학문적인 분류의 목적으로 고인돌을 해석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고분이 나타나기 전에 고인돌은 그냥 마을의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그런 공간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조상을 모신다라는 관점보다는 땅과 함께하고 살아간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인간의 생활주거지가 주로 하천이나 낮은 구릉에 있었기 때문에 고인돌은 일반적으로 하천유역의 대지와 낮은 구릉에 많이 축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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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석묘의 지는 땅지가 아니라 가지지(시支)다. 손으로 나뭇가지를 잡은 형상으로 버티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경상남도 기념물 제39호로 지정되어 있는 신벽동 지석묘는 독특하게 현재 김해 김 씨의 문중 무덤이 있는 곳에 같이 있다. 신벽동 지석묘군은 크고 작은 것들이 묘역을 달리하여 분포하고 있기 때문에 청동기시대의 묘제를 연구하는데 도움이 되고 있다고 한다.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가르칠 수 없으며 배움이 없는 사람은 쉽게 말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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