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운을 찾아, 청학동에 들다.
최치원이라는 사람의 인생은 후대에 많은 화자를 낳고는 있지만 그의 인생 흔적을 따라가다 보면 참 고독하게 자신만의 길을 걸어갔던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이상과 생각, 남다른 지식은 다른 사람과의 차이를 벌릴 수밖에 없었다. 최치원이라는 사람이 남긴 흔적과 글은 수없이 많이 있지만 그의 형제나 부모, 가족에 대한 이야기는 알려진 것이 많지가 않다. 깨달음이라는 돌은 처음에는 움직이기가 무척이나 힘들다. 그렇지만 1년, 2년, 10년이 넘도록 계속 노력한다면 어느샌가 속도가 붙기 시작하여 무언가를 습득하는데 무척이나 용이해진다.
하동 야생차 박물관에서는 지난해 11월부터 오는 6월 30일까지 3층 기획전시실에서 '최고운을 찾아 청학동에 들다'라는 주제로 전시전이 열리고 있어서 찾아가 본다.
"어찌하면 세속의 번잡함 다 떨쳐 버리고서
공과 함께 푸른 하늘에서 노닐 수 있을까."
청학동을 찾아왔지만 청학동은 없고 최치원만이 남아 있었다. 고운 최치원은 한없이 자유롭게 생각하고 누렸던 그 생각을 찾아가는 길이다.
고운 최치원은 뛰어난 재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의 거대한 벽 앞에서 좌절할 수밖에 없었던 한 인간이자, 자신의 방식으로 현실을 초월한 인물로 평가되었다. 후대에 그런 능력을 펼칠 수 없어 벽에 부딪쳤던 그의 불우한 삶을 안타까워했고 그의 재주를 흠모했다.
지리산과 하동지역의 고지도도 만나볼 수 있다. 자세히 살펴보면 고운 최치원이 오고 갔던 그 길을 보여주는 것처럼 보인다. 지금도 빼어난 자질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학벌이나 지역, 가족 등의 이유로 현실을 뛰어넘지 못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은데 과거에는 오죽했을까.
"가을바람에 애써 읊조리건만 세상에 알아주는 이 드물구나."
지금의 화개장터는 최치원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는 곳이다. 쌍계사의 진감선사 탑비를 비롯하여 세이암, 삼신동, 쌍계석문, 최근에 발견된 완폭대등이 그의 글씨라고 한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지리산의 골짜기인 청학동에 머문다고 생각하였다.
고운은 천 년 전 사람
수련을 쌓아 학을 타고 다녔지
쌍계에는 옛 자취만 허전하고
흰 구름 골짜기에 아득하여라
"치원은 서쪽에서 대당을 섬길 때부터 동으로 고국에 돌아왔을 때에도 모두 어지러운 시절을 만나 처신하기가 어렵고 걸핏하면 허물을 뒤집어쓰니, 스스로 때를 만나지 못한 것을 한탄하면서 다시는 벼슬길에 나아갈 뜻이 없었다. 유유자적 노닐며 자유로운 몸이 되어 산림이나 강과 바닷가에 누각과 정자를 짓고 소나무와 대나무를 심어놓고 책을 베개 삼아 읽고 풍월을 읊조렸다." - 삼국사기
고운 최치원의 삶을 보면서 최근에 일어난 일련의 일들과 겹쳐지는 느낌이 들어 더욱더 그의 삶이 와 닿았다. 사회는 모든 것이 그렇게 객관적이고 공평하고 합리적으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은 잘 알고 있지만 적어도 그렇게 나아가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할 필요는 있다.
오늘도 운동을 하고 왔지만 옛날에 도교의 의식을 반영했으며 심신을 수양하고 신성을 얻은 존재를 바로 신선이라고 부른다. 호흡조절과 요가와 비슷한 운동, 곡기를 끊는 식이요법 등의 방법으로 생명을 연장하려고 했다. 경주 최 씨의 시조인 최치원이 실제 신선이 되었는지는 알지 못하지만 적어도 그가 바랬던 길은 같이 걸어가고 싶은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