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공부를 했던 후손의 집
지금 안동에 자리한 퇴계종택은 퇴계 선생의 영손 동암(東巖) 공이 한서암 남쪽에 지은 가옥이지만 1907년 왜병의 방화로 두 곳 종택이 다 불타버렸고, 지금의 집은 1926년∼1929년 사이에 13 대사 손 하정(霞汀) 공 이충호가 이곳에 세거 하던 임 씨(任氏)들의 종택을 매입하여 이건하여 추월 한수정은 옛 건물처럼 재건하였다고 한다. 필자가 글을 쓰면서 언급하는 사람 중에 퇴계 이황은 많이 등장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퇴계 이황은 비교적 늦은 나이에 경지에 도달한 사람이다. 조선시대 최고의 유학자이자 탁월한 교육자였던 퇴계 이황은 53세라는 늦은 나이에 마침내 자득의 경지에 도달하자 커다란 샘물이 솟구치듯이 수많은 저작을 쏟아냈던 것이다. 50세가 넘은 나이에 책을 계속 읽고 공부를 계속하는 사람은 지금도 많지 않다.
퇴계종택의 규모는 상당한 편이다. 총 34칸의 건물로 전체적으로 보면 5칸 솟을대문과 ‘ㅁ’ 자형 정침 영역, 그 동북쪽 약간 뒤로 같은 규모의 5칸 솟을대문과 추월 한수정으로 이루어진 공간과 뒤쪽에 있는 사당 영역으로 구분되어 있다.
퇴계 이황에 대한 이야기는 수시로 썼지만 정작 퇴계종택은 처음 와본다. 퇴계종택은 지금도 후손들이 살면서 그 정신을 이어가고 있다고 한다. 퇴계 이황은 숨지기 3일 전에 사후 상례와 석물을 화려하게 하거나 비석을 세우지 말고 조그만 돌의 앞면에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고 새기도록 유언한다. 보통 다른 사람에게 묘비명을 지어줄 것을 청하면 칭찬일색인 경우가 많아 솔직하게 자신을 바라보며 4언 24구 96자의 묘비명을 남겼다고 한다.
비록 퇴계 이황이 한 번도 거주한 적은 없지만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퇴계 이황이 지은 서당도 있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곳은 아니다. 퇴계 정신을 이어가는 공간이자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오매 물망 실행했다는 그 의미가 후손을 통해 이어지고 있다. 思無邪(사무사) 愼其獨(신기독) 無自欺(무자기) 毋不敬(무불경)가 바로 그것이다. 그중 無自欺(무자기)는 자기만족과 기쁨 및 이득을 위해 타인을 속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자존감을 위해 짐짓 자신을 속이거나 자신에게 속아주는 일이 없다는 의미다.
지은 지 100년도 안되었지만 그 정신의 의미를 오롯이 담고 있는 곳이다. 퇴계는 벼슬을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1년 9개월 동안 지내다가 세상을 떠났다.
퇴계종택 뒤로는 선비문화수련원이 있고 도산서원으로 이어지는 길과 퇴계문화공원, 계상서당, 퇴계선생묘소등이 자리하고 있다. 조선에 들어서고 나서 불교는 유교와 대척점에 있었다. 즉 유교를 기반세력으로 공고하게 하기 위해 불교를 배척하고 공격하는데 적지 않은 유학자들이 나섰다. 그렇지만 퇴계는 성리학자로서 불교를 옹호하지는 않았으나 사람들의 생각이 다양함을 인정하고, 소신에 따라 처신할 일이지 통문을 돌려 대궐까지 나아가서 집단행동으로 보우 스님을 탄핵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자신의 소신을 밝혔다.
바른 생각이란 다양함을 인정하는 것과도 연결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