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암 이재(1680~1746)를 기리는 학천정(鶴泉亭)
역사를 깊게 이해하지 않으면 조선의 역사는 일제강점기에 주입식으로 만들어놓은 선입견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다. 특히 1940~1960년 중반까지의 교육은 조선의 역사를 왜곡되어 받아들이게 만들었다. 지금도 역사적인 편견에서 자유롭다고 볼 수가 없다. 지금도 보면 타자를 이해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조선의 역사에서 유교는 철학적인 관점에서도 상당히 치열하게 대립을 해왔다. 문경의 선유동 계곡은 1곡 안개에 싸인 바위, 옥하대(玉霞臺), 2곡 영사석(靈槎石), 3곡 활청담(活靑潭), 4곡 세심대(洗心臺), 5곡 관란담(觀爛潭), 6곡 탁청대(濯淸臺), 제7곡 영귀암(詠歸岩), 8곡 난생뢰(鸞笙瀨), 9곡 옥석대(玉舃臺)까지 오면 학천정(鶴泉亭)이 자리한 것을 볼 수 있다.
이날 선유동구곡의 학천정에만 머물렀다. 학천정에 오면 호락논쟁(湖洛論爭)에서는 이간(李柬)의 학설을 계승해 한원진(韓元震) 등의 심성설(心性說)을 반박하는 낙론의 입장에 섰던 이재가 생각난다. 학문적으로 가장 높은 수준에 올랐다는 정조대까지는 철학의 균형을 잡았었다.
역사에 관심이 많지 않은 사람이라면 ‘호락논쟁(湖洛論爭)’은 낯설을 수밖에 없다. 호락논쟁은 조선 후기 18세기 초반에서 19세기 초반까지 이어진 유학자들의 논쟁이다. 호(湖)와 낙 (洛)은 충청도와 서울을 가리키는 말로 당시 학계의 주류였 던 노론 학자들이 주로 충청도와 서울을 기반으로 학파를 형성했던 것에 기인한다.
선유구곡을 흘러가는 물을 보고 있으면 호락논쟁에서 본성이 무엇인지 다시금 보게 한다. 일반적으로 지방에 근거지를 뒀던 호론이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성리학을 추구했고, 외래 문물과 다양한 이론을 접하기 쉬운 서울이 근거지였던 낙론은 유연한 태도를 보였던 것이 사실이다. 여자는 천하며 노비 역시 그 한계를 벗어날 수 없으며 동물이나 오랑케는 오랑캐일 뿐이다라고 생각이 고착화된 것은 순조대부터였다. 즉 너는 틀리고 나는 틀리더라도 맞는 것이다라며 차별주의에 사로잡힌 것이 호(湖)의 논리다.
호락논쟁은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이 서로 같은지 다른지와 성인(聖人)과 범인(凡人)의 마음은 같은지 다른지를 가지고 끊임없이 논쟁을 했다.
"사람이 물(物)을 보면 사람이 귀하고 물이 천하지만, 물이 사람을 보면 물이 귀하고 사람이 천하다. 하늘이 보면 사람이나 물이 마찬가지다” - 의산문답
학천정에 모셔진 도암 이재는 호락논쟁의 처음부터 끝을 모두 경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의리론(義理論)을 들어 영조의 탕평책을 부정한 노론 가운데 준론(峻論)의 대표적 인물로, 윤봉구(尹鳳九)·송명흠(宋命欽)·김양행(金亮行) 등과 함께 당시의 정국 전개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학천정 뒤 바위에 새겨진 산고수장(山高水長) 글씨가 눈에 뜨인다. 덕행이나 지조의 높고 깨끗함을 산의 높음과 강물의 긴 흐름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 산고수장이다.
타자의 인정문제는 결국 차별과 배타성으로 이어진다. 호락논쟁의 근본에서 우리는 이 사회가 가지고 있는 타인에 대한 배타성이나 다른 학벌이나 지역을 차별하는 것을 가로 읽어볼 수 있다. 영정조 시대까지 균형을 이루던 철학적인 논쟁은 ‘세상을 움직이는 바른 도리이자 원칙’이라는 의미의 ‘세도’(世道)에서 외척들이 국왕에게 세도를 위임받은 존재처럼 굴었고 이후 사람들은 ‘세도’(勢道)라고 바꿔 부르기 시작하며 힘과 세력이 좌우하는 시대가 도래했다.
학천정이 자리한 문경 선유구곡의 9곡은 균형미가 있다. 세상을 유연하게 바라보자는 낙론 역시 다른 의미로 해석이 될 수 있다. 정권의 힘을 얻은 낙론의 어떤 가문은 이중적인 태도를 취하기도 했다. 호론의 후예 들은 나라를 잃을 위기에서 위정척사(衛正斥邪)로 저항했다. 산이 높은 것처럼 높은 가치를 향해 나아가며 물이 길게 흘러가는 것처럼 길게 바라봐야 하는 시간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