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의 문화유산 박열의사 생가지
짧던 길던간에 인생을 자신이 가고 싶은 길을 가는 사람이 있고 그냥 흘러가는 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 특히 힘에 의해 억압을 받게 되면 무언가를 포기하던지 억압받은 채로 살아가게 된다. 일제의 제국주의가 한참 팽창을 하던 시기에 일본의 국민 역시 국가가 가고 싶은 방향으로 흘러가며 살 수밖에 없었다. 조선인들이 더 많은 억압을 받았지만 일본 국민들도 자유의지로 살기가 힘들었다. 일본에서 조선인 박열을 만나 그의 생각에 감동받아 아나키스트의 삶을 살았던 가네코 후미코의 묘는 문경에 있다.
박열의사의 생가지에는 박열의사 기념관이 자리하고 있지만 그의 묘는 없다. 박열의사는 북에 있기에 이곳에 있는 묘는 그와 함께했던 가네코 후미코의 흔적이다. 박열은 독립운동을 했지만 좌우를 결정해야 하는 시기에 중립노선을 걸었기에 한때는 남한에서도 북한에서도 빛을 보지 못했다.
마성면 오천리에 자리한 박열의사 생가지는 지난 2004년 경상북도 기념물 제148호 지정이 되어 있다. 박열의 인생에 있어서 그를 완벽한 아나키스트로 만든 것은 바로 첫 번째 부인이었던 가네코 후미코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전에는 박열의사의 흔적을 찾아 돌아보는 글을 썼지만 이번에는 일본인지만 그 폭압에 항거하고 천황이 없는 일본 제국을 쓸어버리는 일에 앞장섰던 가네코 후미코의 삶을 돌아본다.
가네코 후미코의 묘는 원래 문경읍 팔영리에 모셔져 있다가 박열의사 생가지 옆으로 옮겨 두었다. 그녀의 사상과 삶을 연구하는 연구서도 많이 발간되었을 뿐 아니라 일본인들이 가네코 후미코 여사를 보기 위해 그의 고향마을을 적지 않게 찾고 있다고 한다.
앞에 보이는 묘가 가네코 후미코의 묘이다. 가네코 후미코는 천황 암살기도 사건으로 사형을 언도받았을 때 박열과 자신을 한 교수대에서 목매어 죽인 다음에 죽은 백골도 더불어 묻어달라고 하였다고 한다. 박열과 만나 연인이 되었던 그녀는 흑도 외와 흑우회에 가입하고 잡지를 발행하면서 같은 길을 걷는다.
원래 박열의사가 태어난 집은 1900년 이전에 지은 집으로 추정되지만 이후 수차례 소유주 변경과 보수 및 증. 개축에 의해 본래 모습을 대부분 잃고 말았던 것을 다시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23년 9월 1일, 간토 대지진이 일어났는데 일제는 이 일이 조선인과 사회주의자에 의한 것이라는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토벌에 나섰다. 일본 사회주의의 대부 오스기 사카에(大杉栄) 부부가 총살되고 조선인 6천여 명이 학살되었다. 이것이 간토 조선인 대학살 사건이다.
1903년 요코하마 시에서 사에키 분이지와 가네코 기쿠노 사이에서 태어났지만 후미코는 아버지의 호적에 올라가지 못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폭행과 바람기를 견디지 못하고 가네코를 데리고 가출해 여러 남자와 동거를 거듭했다. 일본으로 귀국하기 전 일어난 3·1 운동을 목도하며 조선인의 의기에 큰 감동을 받았던 그녀는 고모와 할머니에게 학대받고 자살 시도까지 했으면서도 삶을 주도적으로 이끌려고 노력을 했다. 감형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박열이 사형을 받으리라 생각한 가네코는 은사(恩赦)를 거부하고 1926년 7월 우쓰노미야 형무소에서 목을 매 자결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