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 부여박물관 속의 백제
행정구역으로서 5부(部)와 25항(巷)이 있었으며 상부(上部)·전부(前部)·중부(中部)·하부(下部)·후부(後部)의 왕도 5부제가 동부·서부·남북·북부·중부의 5부로 변화하게 되면서 그 하위에 5항을 두며 마지막 백제의 도시계획이 있었던 시대가 사비백제다. 사비백제의 역사를 살펴보면 신라와 애증의 역사였다. 무령왕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명농(明穠)이 즉위하였는데 그가 바로 성왕이다. 성왕은 재위 16년 봄에 사비(泗沘)로 수도를 옮기고 남부여(南扶餘)로 국호를 개칭하였다. 애초 부여에서 시작하여 고구려와 백제로 갈라지고 이 땅에 왔지만 애초의 부여로 돌아갔음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국립 부여박물관은 선사시대의 백제의 유물 등을 통해 그 역사와 생활상을 살펴볼 수 있지만 사비시대의 백제를 잘 살펴볼 수 있는 곳으로 국립공주박물관이 웅진시대 무령왕에 많은 비중을 두고 있다면 사비백제와 금동대향로 등에 많은 비중을 할애하고 있다.
유럽은 폭염이 시작되고 있다고 하는데 한국은 곧 시작될 폭염이 유럽 정도는 아니어서 지역으로 여행하기에 괜찮은 편이다. 옛 영화를 간직한 백제의 고도지만 조용하고 한적한 여행지 부여는 고요한 느낌마저 드는 곳이다. 그렇지만 국립 백제박물관은 그 역사를 충분히 생생하게 잘 알리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백제가 고대국가로 자리하기 전에 부여지역에도 선사시대, 청동기시대 등 고대문화가 있었다. 금강의 줄기인 백마강이 흐르며 호남평야를 지척에 두고 있었던 부여 역시 사람들이 거주하기에 적절한 곳이었다.
넓은 구릉을 기반으로 바다와 맞닿아 있던 부여지역은 기원전 1,500여 년경부터 큰 변화가 있었다고 한다. 빗살무늬에서 민무늬토기로 변화하면서 생활상의 큰 변화와 함께 청동기시대가 시작이 된 것이다.
최근에 시작한 드라마에서 보듯이 현대 사람들이 보기에 별 것 아닌 것 같은 기술이지만 큰 변화였다.
비파형 동검은 질리도록 보아서 그런지 이제는 친숙한 느낌이다. 이 청동 검은 비파라는 악기 모양과 닮아서 ‘비파형 동검’으로 불리게 되는데, 랴오둥 반도와 한반도 곳곳에서도 적지 않게 쓰였다.
국립 부여박물관은 군더더기가 별로 없이 옛 유물을 감상할 수 있도록 전시관을 구성해두었다.
청동기 시대의 개막과 더불어 모든 사람이 함께 일하고 함께 나누는 공동체는 사라졌으며 본격적으로 지배하는 자와 지배받는 자로 나뉘었다. 지배자들은 청동 검과 함께 청동 방울, 청동 거울을 몸에 걸치고 부와 권력을 뽐냈는데 비파형 청동검은 그런 상징물이었다.
피지배층에게는 청동거울과 비파형 청동검 등이 황금색으로 번쩍거리는 것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단단한 철을 녹일 수 있을 정도로 가마 기술이 발달하면서 토기문화도 다시 한번 성장하게 된다. 이때 민무늬토기는 사라지고 폐쇄된 가마에 오랜 시간 가열해서 만드는 토기가 주로 등장한다.
사비백제 하면 백제 금동대향로를 빼놓고 이야기하기 힘들다. 백제의 전통기술이 모두 접목되어 그 아름다움이 절정에 달했다는 백제 금동대향로는 사비백제의 상징적인 유물이다.
사비백제를 재현해놓은 곳에 가면 백제 귀족 사택 지적의 집을 재현해놓은 곳이 있다. 이비는 백제 귀족이었던 사택 지적 비인데 부소산 남쪽의 관북리에서 발견된 이비에는 남북 조풍의 해서체로 56자가 새겨져 있다. 사택가문을 비롯하여 백제 귀족들이 향유했던 문화의 한 단면을 보여주며 세월의 덧없음을 표현하고 있다.
사비시대의 중요한 유물은 왕의 무덤인 능산리 고분군과 귀족들의 무덤인 능안리 고분군에서 주로 출토되었다. 최근에 다시 재발굴된 능안리 고분군의 1호분은 사비로 천도한 직후인 6세기대의 무덤으로 보인다”라고 전했다. 3호분의 경우 깬돌, 즉 할석이 아니라 직사각형으로 잘 다듬은 쪼갠 돌(판석)을 이용해서 육각형 형태로 조성했다. 이것은 7세기대 사비기 백제의 무덤 조성 양식이다. 그리고 무덤 입구를 조성하지 않은 5호는 7세기로 편년 되지만 가장 늦은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백제 건국 세력이 부여계 유이민이었음을 강조하고 있는 자료는 백제본기에도 있다. 처음의 국호 십제(十濟)를 백제(百濟)로 바꾼 시기는 미추홀에 남아 있던 비류 세력이 귀속해 오고 마한의 일부인 백제(伯濟) 세력을 정벌해 통합하면서 백제라 부른다. 당시 백성들이 모두 위례로 돌아왔는데, 돌아올 때 백성들이 즐겁게 따라왔다고 하여 국호를 백제로 고쳤다.
백제의 고대국가를 정비한 사람은 고이왕으로 고이왕 대에 신라에 대한 공격이 시작되었다. 이로써 백제와 신라의 적대적인 관계가 서막을 올리게 되었다. 그 애증의 역사는 이곳 사비백제에 와서 절정에 이르며 국가의 존망을 결정짓게 된다.
백제는 서기 538년 성왕 16년부터 의자왕 20년까지 123년간 이곳 사비에서 부귀와 영화를 누렸다. 대한민국이 삼일운동이 일어난 1919년을 건국으로 보아도 이제 100년이 되었으니 그 역사가 짧지만은 않다. 성왕은 친히 보병과 기병을 거느리고 신라에 이르렀으나 관산성(지금의 옥천)에서 죽음을 맞이했으며 그의 맏아들 위덕왕(威德王, 554~598년)은 신라에 대한 복수를 도모하다가 승하하였다. 그리고 동생 혜왕(惠王, 598~599년)은 즉위 2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이어 왕에 오른 법왕(法王, 599~600년)도 왕흥사를 창립하고 불교를 중흥시키는 등 체제 정비에 힘을 기울였으나 2년 만에 승하하였다. 법왕의 아들로 서동 설화의 주인공인 무왕(武王, 600~641년)은 익산 경영에 힘쓰면서 신라에 대한 공격을 강화하였다. 그러나 백제와 신라의 생존을 위한 마지막은 의자왕대에서 결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