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전투 메모리얼 파크
한반도의 전체 지역이 화마에 휩싸인 것은 임진왜란 때도 있었지만 현대식 무기에 의해 거의 전역에서 전투가 일어난 것은 한국전쟁이다. 그만큼 한국전쟁을 겪은 세대들이 경험한 악몽은 이념갈등으로 오래도록 남을 정도로 강렬했다. 파죽지세로 남쪽으로 밀고 내려오던 북한군은 경상남도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 마치 승리를 코앞에 둔 것 같았다. 당시 영천 전선은 미군이 생각할 때 마지막 마지노선이었다. 미 8군은 8월 초 낙동강 방어선을 형성할 당시, 울산 북쪽에서 경상남북도 경계선을 거쳐 함안을 연결하는 정면이 90㎞에 달하는 선상에 예비 진지를 구축하게 된다.
영천전투 메모리얼 파크는 그 영천에서 역전을 기념하여 만들어진 곳으로 군사체험과 당시의 상황을 엿볼 수 있도록 해두었다. 미 합참은 영천 전선까지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인천 상륙작전을 재검토하려고 생각까지 한다. 두 차례에 걸쳐 맥아더 장군에게 인천 상륙작전을 취소하고 낙동강 방어선을 보완하는 것으로 재검토할 것을 권유하는 의사를 타진했었는데 맥아더는 인천 상륙작전을 고수한다.
마지막으로 영천이 돌파될 위기에 처하자, 미국은 한국을 한때 포기하겠다고 검토했다고 한다. 당시 미 합참에서는 대한민국 정부와 군대를 포함해 62만 명을 미국령 사모아도에 재배치해 신한국을 창설하겠다는 계획(New Korean Plan)을 승인한다.
영천이라는 지역은 반격의 계기의 전투가 벌어졌기에 의미가 크다고 한다. 영천지구 전승비는 6·25 전쟁에서 수세에 몰렸던 국군에게 총반격의 계기가 된 영천지구 전투의 승리를 비롯하여 1950년 8월과 9월 사이 42일간 치열하게 벌어진 국군 제2군단과 북한군 제2군단 간의 전투에서 북한군을 북쪽으로 퇴각시킨 신녕 지구 전투를 기억하고 있다.
1950 영천대 혈투 속으로 들어가 보는 공간이다. 당시 전투를 간접적으로 경험해볼 수 있는 공간이다.
군대에서 저런 지프차를 비롯하여 5/4 ton, 2 1/2 ton, 5 ton, trailer 등을 몰아본 기억이 난다.
전쟁이라는 것이 일어나지 않으면 좋겠지만 전쟁으로 인해 많은 것이 변화된다.
1950년 8월 25일 영천에 첫 포성이 울렸다. 개전 두 달째를 맞아 한껏 기세를 올린 북한군의 공세가 시작되는 신호였다. 영천이 돌파당하면 북한군은 단숨에 대구와 경주를 점령하고, 국군을 동서로 분단해 포위·섬멸할 것이 뻔했다. 방어선을 지키기 위해 당시 전투에서 영천에서만 약 1천800여 명의 아군과 4천여 명의 적이 전사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전쟁을 하면 참호전은 필수적이다. 몸을 숨기고 전투를 수행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옷 좀 잘 입는 사람이 입고 다니는 트렌치코트는 참호전 속에서 탄생한 전쟁의 유산이다.
‘1950, 영천 대혈투 속으로’라는 테마로 맵핑 입체영상으로 보는 영천전투, 지프 영상으로 만나는 고지전, 영천 시가지 공방전 체험 등 전시체험물을 볼 수 있는 이곳에서 아주 오래전에 사용했던 군장을 보았다. 지금 군대를 가는 사람들은 이 군장을 볼일은 없을 것이다. 굳이 손이 무지 많이 가게 만들어놓은 비효율적인 군장비였다.
이곳에는 지휘통제소를 중심으로 한국전쟁 당시 영천의 시가지 재현하는 시가전 체험장, 깃발 타워, 엄폐물이 있는 고지전 체험장과 웅덩이 건너기, 통나무 다리 건너기, 줄다리 건너기, 팀 수직 네트, 사선 암벽 타기, 우리는 한마음, 하강 훈련 등 7종을 체험해볼 수 있는 국군 체험장이 자리하고 있다.
영천에서 반격의 기회를 잡고 인천 상륙작전이 성공으로 전세가 역전되어 북까지 올라갔던 그해 통일의 기대가 한껏 부풀어 올랐던 1950년 10월이 지나고 11월이 되자 전선의 상황은 이상하게 돌아갔다. 12월에 중공군이 대규모로 개입되는 순간 지금까지의 전쟁은 다시 새로 시작하게 되었다. 전쟁은 또 다른 기적을 낳았다. 1950년 12월 24일 미군은 군사적 철수를 완료함과 동시에 9만 8,000명의 피난민과 함께 북한을 탈출하는 데 성공하였다. 수세에 몰렸다가 반격의 기회를 잡은 기념비적인 영천 메모리얼과 철수작전이 기적이 되도록 만든 것은 전쟁에서 시작된 것이다. 이 기억을 토대로 전쟁이 이 땅에 다시 일어나지 않게 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