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의 인물 여헌 장현광
오늘날 벼슬길의 정점에 올라서기 위해서는 보통 청문회라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런데 여당이나 야당이나 청렴하고 서민적인 관점에서 결점이 없는 대상자가 없는 것일까. 그곳까지 가다 보니 깨끗해지지 않은 것일까 궁금할 때가 있다. 절대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었을 것 같은 임금조차도 마음대로 벼슬을 주는 것이 쉽지가 않았다. 여러 의견을 받고 평가에 의해 천거를 했다.
여헌기념관은 구미의 옛 교육기관 중 한 곳인 인동향교(仁同鄕校)를 마주 보고 있다. 평소에는 기념관은 오픈되지 않아 여헌기념관과 인동향교를 둘러보고 낙동강이 흐르는 강가를 걸어보았다. 여헌 장현광은 관직에 있는 자로서 사사로운 것을 추구하지 말아야 한다고 평소의 소신을 밝혔다. 여헌 장현광의 본관은 바로 인동(仁同)이다.
"사사로운 마음이 있는 곳에는 일을 그르치지 않음이 없다.
한 몸에 있어서는 한 몸은 일을 그르치고,
한 집안에 있어서는 한 집안의 일을 그르치고,
한 나라에 있어서는 한 나라의 일을 그르치고,
천하에 있어서는 천하의 일을 그르친다.
사람이 이 관문을 타파하여 얽매이는 바가 없다면
몸과 집안과 나라와 천하에 장차 또한 여유가 있을 것이다."
- 여헌 추정록 중에서
대학자의 면모를 나타내기 시작하면서 그의 재능이 드러나자 그가 벼슬길에 천거된 것만 살펴볼까. 전옥서참봉(典獄署參奉), 예빈시참봉, 제릉참봉, 보은현감, 경서교정청낭청(經書校正廳郎廳), 거창현감, 서언해교정낭청(經書諺解校正郎廳), 용담현령, 의성현령, 순천군수, 합천군수, 사헌부지평, 사헌부지평, 성균관사업, 사헌부대사헌, 이조참판, 지중추부사, 의벙부우참찬등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몇몇 벼슬에 부임하기는 했으나 금방 다시 돌아왔다.
여헌이 연구한 분야 중 중점을 둔 것은 역학이었다. 여헌의 뿌리인 인동장씨는 고려 초 인동에 정착한 이래 1000여 년 동안 대대로 인동에 살면서 번영을 누렸다고 한다. 여헌 역시 퇴계 이황처럼 50대 중반에 학문적 완숙기를 이룬다. 벼슬을 멀리하며 처 사적인 삶을 살았던 여헌은 암울한 시대를 마감하고자 하는 열망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다.
주역은 다름 아닌 뜻을 밝히는 학문이다. 뜻을 안다는 것은 그것의 변화를 예측할 수 있는 것이니 바로 미래를 안다는 의미가 되는 것으로 사물의 뜻을 살핌으로써 그것에 함축된 미래를 살피는 것이다. 장현광이 벼슬길을 하지 않는 것은 그 뜻을 알기에도 부족했던 자신의 시간을 가지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건너편에 인동향교가 보인다. 구미의 인동향교의 규모는 작은 편이다. 여헌 장현광은 인동향교 아래쪽으로 내려가면 동락서원이 나오는데 그곳에 제향이 되었다. 당대 산림의 한 사람으로 왕과 대신들에게 도덕정치의 구현을 강조했던 일생을 학문과 교육에 종사했고 정치에 뜻을 두지 않았다.
여헌 장현광의 흔적을 살피고 아래로 내려오면 낙동강이 나온다. 낙동강 옆에는 구미의 대표 공원 중 한 곳인 동락공원이 조성이 되어 있다. 살다 보면 에너지가 넘쳐서 긍정적인 사람이 있고 에너지가 부족해 유독 맥이 빠진 사람이 있다. 영혼의 힘은 주역에서도 표현하고 있다. 공자는 주역의 건위천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하늘의 운행은 건실하니, 군자는 이를 본받아 스스로 강하게 하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동락공원의 옆으로 흐르는 낙동강이라는 이름은 아주 오래전에 지어졌다. 가락국의 땅이었던 '상주의 동쪽으로 흐르는 강'이란 뜻으로 낙동강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상류부의 안동분지, 중류부의 대구분지, 하류부의 경남평야 등이 있는 낙동강은 영남지방의 대동맥으로서 이 지역의 문화를 발달시킨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여헌 선생은 금오산 동쪽 기슭인 구미시 오태동의 양지바른 언덕에 묻혔다. 그는 올바른 가치를 세우고 실현하려는 그의 인생 역정은 선비의 모습 그 자체였으며, 위대한 학자이자 영원한 스승으로 남아있다. 동락공원의 동락(東洛)은 동방의 이락(伊洛)에서 유래한 것으로 인동 지역에서 출생하여 대학자가 된 여헌 장현광(張顯光, 1544~1637)을 기리는 동락서원에서 공원 이름이 유래하였다.
"천하에 제일가는 사업을 할 수 있어야 천하에서 제일가는 인물이 된다." - 여헌 장현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