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사 박문수의 재실
한문 그대로 해석하면 집이 들어오는 출입구가 가문이다. 종중이 넓은 의미의 부계 혈연집단이라면 가문은 좁은 의미의 부계 혈연집단으로 해석이 된다. 성씨를 따라가기 때문에 부계는 자연스럽게 남계혈통의 전체로 이어진다. 시조를 중심으로 한 종회, 중시조·파시조(派始祖)를 중심으로 한 종회, 입향조를 중심으로 한 종회 등이 있다. 고령에는 박씨중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고령 박씨의 재실인 만남재가 있다.
만남재는 고령 만대산성이 있는 만대산의 산자락에 있어서 그렇게 명명된 것으로 보고 있다. 또한 만대산이라는 이름은 고령신씨가 이 산에 시조 묘를 쓰면서 만대(萬代)에 영화(榮華)가 지속되기를 바라는 의미에서 만대산의 명칭이 유래되었다. 한 세대가 30년으로 본다면 무려 30,000년동안 영화가 지속되기를 바라는 의미의 산이다. 고령은 가문의 시조가 되는 성씨가 생각보다 많다. 역사에서 그다지 좋은 평가는 받지 못했지만 학자였던 고령신씨(高靈申氏) 시조이자 신숙주(申叔舟)의 선조인 신성용의 시조 비와 묘가 고령에 있다.
처음에 만남재에 왔을 때는 너무 오래된 건물에 관리가 잘 안되어 있었는데 최근에는 깨끗하게 정비된 모습이었다. 만남재는 고령박씨의 중시조인 청하공(淸河公) 박지(朴持)의 묘를 수호하고, 종중회의를 열기 위해 마련한 재실이다. 재실을 관리하기 위해서는 종중에 재산도 어느정도 있고 관리하는 사람도 있어야 하기에 가문의 힘이 있어야 한다.
지금도 가문을 중요시하는 이유는 조상의 음덕 혹은 가문의 힘을 믿기 때문이기도 하다. 만남재에 모신 고령박씨의 중시조인 청하공(淸河公) 박지(朴持)의 비문은 1728년 그의 11 세손이자 조선 후기 문신이며 병조판서, 호조판서 등을 역임한 암행어사로 유명한 박문수(朴文秀)[1691~1756]가 지었는데 자신도 조상의 음덕으로 경상도 안찰사가 되어 조상의 분묘를 중수함에 비문을 새로 쓰게 되었다고 밝히기도 하였다.
만남재의 건물은 1670년에 건립되고 1974년에 솟을삼문을 신축하였다고 하지만 현재의 건물은 1670년 이후 여러 차례의 중건을 거친 것으로 보인다. 건물의 내부로 보면 건물 내부의 현액인 묘각영건유사록(墓閣營建有司錄)에는 “동치(同治) 원년[1862년] 임술 4월 19일 오시 입주”라고 쓰여 있다. 재실은 나지막한 막돌 기단 위에 정면 4칸, 측면 2칸을 구성한 홑처마 팔작집이다.
평면 구성은 어칸 대청의 좌우에 1칸씩 온돌방을 들인 중당협실형으로 전면에 반 칸 크기의 툇마루를 두고, 양 측면에는 쪽마루를 두었다. 대청의 바닥은 우물마루, 천장은 연등천장으로 구성하였으며, 대청 전면을 개방하고 배면의 각 칸에는 쌍여닫이 판문을 달아두었다.
안으로 들어와서 보면 뒷벽에 ‘만남재(萬南齋)’, ‘영모암(永慕庵)’, ‘봉서루상량문(鳳棲樓上樑文)’, ‘묘각영건유사록(墓閣營建有司錄)’ 등의 현판과 편액들이 걸려 있다. 전면의 평주는 모두 원주이나 나머지는 방주를 사용하였는데 구조는 5량가의 소로주장집이다.
높이는 688.7m의 만대산은 철쭉 군락지가 형성되어 있어 봄철에는 많은 관광객 및 등산객이 찾는 곳이지만 예전에는 고령군 쌍림면과 합천군 합천읍 용계리를 이어주는 교통로 역할을 했던 곳으로 주요 요충지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만대가 영화를 누릴 수 있는 가문이 실제로 있을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먼 옛날의 시조에서부터 무수히 많은 조상들을 거쳐 현재에까지 이르렀고, 또한 앞으로도 무한히 계속될 초시간적인 연속체로 볼 수 있다. 가문의 개념은 오늘날에는 비록 많이 약화되기는 하였지만 여전히 지속되어 우리들의 생활에 많은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