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향산고택. 치암고택
사실 부끄러움을 아는 것은 무척 어렵다. 부끄러움이라는 것은 자신을 돌아봐야 살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보통 자신을 살피고 돌아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자신이 하고 싶은 방식대로 살고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정당함을 가지려고 한다. 안동의 치암고택과 향산고택은 같은 공간에 위아래에 자리하고 있다.
고택 두 곳이 한 곳에 모여져 있다. 고택에는 고개가 있는데 안동시의 북문 역할을 하는 도신문이 자리하고 있다. 고객의 주인인 진성이씨로 먼저 만나볼 수 있는 고택은 향산고택이고 그 뒤에는 치암고택이 있다. 특히 고택의 이름으로 사용한 치암고택에서 恥(부끄러움)이라는 의미로 사람이 살면서 부끄러움을 아는 것이라는 의미를 담았다고 한다.
향산고택은 애국지사 향산 이만도 선생의 옛집이다. 이 집안의 내력은 모두 독립운동을 했다는 데 있다. 향산 이만도를 비롯하여 아들 이중업, 아내 김락, 아들 이동흠과 종흡 형제는 독립운동을 했으며 삼대 독립운동 가문의 독립운동사의 지역적 상징성을 가지고 있는 곳이라고 한다.
향산고택은 국가보훈처 지정이 되어 있는 집이다. 경상북도의 지방에서는 ㅁ자형으로 지었는데 그 형태가 독특하다. 본격적인 독립운동사 100주년의 의미가 있는 집이다.
담장 안으로 들어가 보면 조용한 곳이지만 망국의 슬픔을 이기지 못해 자결한 향산 이만도 선생의 정신과 숨결이 있다. 그는 도산서원이 있게 한 퇴계 이황의 11대 후손으로 병인양요가 일어난 해에 25살의 나이로 문과에 장원을 한 후 동부승지 당상관까지 올랐다고 한다.
아직도 살림이 유지되는 곳이라서 구석구석에 사람의 손길이 묻어져 있다. 전통문화를 바탕으로 우리만의 전통문화를 만들어가면서 사는 일은 중요하다. 자신의 재산을 털고 목숨을 바치며 숭고한 삶을 살았다는 이야기는 일반인들이 쉽게 하지 않은 길을 걸어갔던 사람의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향산고택은 19세기 전반에 지어 도산면 토계동에서 1976년 현 위치로 이건 하였다. 현재 고택은 대문간, 사랑채, 안채, 화장실로 구성되어 있는데 고택 체험 프로그램에 동참하여 사람들이 쉴 수 있도록 해주고 있다.
동서방향의 토석 담장과 대문 앞에는 담장과 같은 길이의 장방형 마당을 꾸며 놓았다. 담장 맞은편 마당 끝자락에는 향산고택 사람들의 곧은 심성을 보여주는 대나무가 자라고 있는데 출입은 동서로 나지막하게 쌓은 토석 담장 중간에 있는 일각문 규모의 대문을 이용하면 된다.
치암고택 역시 퇴계 이황의 후손인 치암 이만현의 옛 고택이다. 1910년 일제병합에 따라 나라를 잃게 되자 그분을 이기지 못해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안으로 들어가면 본채와 문간채 사이는 넓은 잔디마당을 꾸며 놓았으며, 대문간에서 본채를 보면 사랑채의 방과 마루가 한눈에 들어온다. 지역 문화 예술인들을 초빙하여 예술 음악회를 개최하거나 전통혼례 장소로도 이용이 되고 있으며 향산고택과 함께 고택 활용을 위한 고택 체험 프로그램도 하고 있는 곳이다.
안채는 안마당을 면한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서측의 우익사에 안방과 부엌간이, 동측 좌익사에 상방과 중방이 있으며 본채는 자그마한 ‘ㅁ’ 자형 안마당을 중심으로 안채와 사랑채가 결합한 ‘ㅁ’ 자형 평면을 하고 있으며 동측 모서리 부분이 돌출한 모습을 하고 있다.
부끄러움을 안다는 것은 인간의 기본이며 가야 할 길이라고 한다. 혼자 있어도 무엇이 잘못되었을지 모르니 삼가고 삼가고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옛 선현의 말을 지켰던 사람들의 공간이다. 맑고 깨끗한 바람을 통해 더러워진 몸 깨끗이 씻고자 함의 청풍, 아침 일찍 일어나 저녁 늦게까지 착한 천성을 변함없이 유지하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의 숙흥야매를 길처럼 생각하고 살았다고 하는데 경북 안동은 유독 퇴계 이황의 후손과 그 정신이 이어지는 곳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