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원되고 있는 부여의 역사 흔적들
중세 국가의 마지막 수도였던 한양은 서울이라는 이름으로 대한민국의 중심이 되었고 통일신라의 수도인 경주, 웅진시대의 공주, 북한의 개성까지 포함하여 역사의 중심으로 자리매김했지만 사비시대를 열었던 부여는 상대적으로 소외된 면이 없잖아 있었다. 입맛이 떨어진 것을 찾기 위해 부여까지 막국수를 먹으러 발걸음을 했다. 그리 오래된 것 같지는 않은데 부소산성으로 가는 길에는 각종 공방, 동헌, 객사, 도강영당, 동헌, 외삼문, 사비문등이 복원이 되어 있었다.
평소에 부여의 역사적인 흔적의 탐방은 낙화암이 있는 부소산성과 정림사지 5층 석탑이 있는 정림사지나 국립 부여박물관, 궁남지가 대표적인 곳이었으나 언제부터인가 이곳이 눈에 뜨이기 시작했다.
처음에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 식객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기도 했는데 객이란 말 그대로 손님이다. 옛날 사람들은 자신의 사람을 만들기 위해 식객을 받았으며 관청에서는 외부지역이나 중앙관청에서 온 사람을 받아들이기 위해 객사를 운영했다. 객사는 객관이라고도 했는데, 지방을 여행하는 관리나 사신의 숙소로 사용했다.
객사는 국가와 국가 간에는 사신을 대접하는 외교적인 공간으로 활용되었으며 명나라와 통하는 연변에는 우리 사신뿐만 아니라 명나라에서 오는 사신도 묵었기 때문에 건물 보수 등 어려움이 많아서 인근 고을의 사람들을 동원하는 일이 때때로 있어 폐단 또한 적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객사의 전형적인 구조를 보면 정당(正堂)을 중심으로 좌우에 익실(翼室)을 두고, 앞면에 중문(中門)·외문(外門), 옆면에 무랑(廡廊) 등이 부속되었다.
부여의 객사를 중심으로 예전에 사용했던 건물들이 주변에 자리하고 있다. 영당으로 보이는 건물 앞으로 배롱나무가 보인다. 배롱나무는 햇볕이 사정없이 내리쬐는 뜨거운 여름날에 꽃을 피운다. 시집 오기 전의 중국 이름은 당나라 장안의 자미성에서 많이 심었기 때문에 ‘자미화(紫微花)’라고 했다.
특히나 여름에 눈에 잘 뜨이는 꽃이 배롱나무 꽃이다. 가지 끝마다 원뿔 모양의 꽃대를 뻗고 굵은 콩알만 한 꽃봉오리가 매달려 꽃을 피울 차례를 얌전히 기다리고 있다. 아래서부터 꽃봉오리가 벌어지면서 꽃이 피어 올라간다.
이곳 도강영당에는 흠가신, 허목, 채제공의 영정을 봉안하고 제사를 모시는 곳이다. 이 건물은 원래 조선말 부여현의 관아 건물이었던 것을 1971년 신축하여 이를 모셨다고 한다.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의 영당은 3인의 영정을 모시고 있다.
객사에 비해 동헌의 규모는 작은 편이다. 부여의 동헌은 부여현의 관아로 1869년(고종 6년)에 다시 지었으며 초연당, 제민헌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부여동헌은 수수한 모습의 건물이다. 정당의 대청을 보면 궐 패를 모시고 익실에는 온돌방을 들였다. 정당 처마에는 봉황 머리와 연꽃 봉오리를 조각하였으며 현감의 처소로 3칸의 대청과 양쪽에 한 칸씩의 온돌방이 자리하고 있다. 이 건물은 백제시대에 사용했던 주춧돌과 기단석을 사용하여 건물을 지은 것이 특징이다.
부여는 연꽃이 피어 있는 곳이 참 많다. 대표적인 여행지 궁남지를 비롯하여 부여 나성 주변과 이곳에도 연지가 조성이 되어 있는데 백제시대 조경을 위한 시설물로 백제시대의 기와 및 토기 편, 목간, 짚신, 금동제 귀걸이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대한민국이 한반도의 역사에 집중적인 관심을 가진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주로 일제강점기에 왜곡되어 만들어진 역사관이 오랜 시간 지배해왔다. 원래 우리 민족이 가진 역사를 제대로 복원하기 시작한 것은 수십 년에 불과하다. 우리가 가진 문화유산이 아무리 대단한 것이라도 그것의 과거 모습을 모르거나, 제대로 복원하지 못한다면 그 가치가 줄어든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가 되듯이 문화유산의 가치는 본래 역사 복원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