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유산 등재 4주년 기념 무령왕릉 사진전
광복 이후에도 25년이 넘도록 백제에 대해 우리는 잘 알지 못했다. 한성에 있었을 것이라고 알고 있었지만 통일신라의 수도 경주는 수학여행의 인기 여행지로 알려져 있을 때도 백제의 고도였다는 공주나 부여는 외면받아 왔다. 조선후기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조차 "주 동쪽 5리에 있다. 옛 능터가 있기 때문에 이름 붙인 건인데, 속설에 백제의 왕릉이라 전해 온다."와 향교조에서는 "주 서쪽에 3리에 있다. 서편에 옛 능이 있는데, 전하기는 백제의 왕릉이라고 하나 어느 왕인지 알 수 없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충청남도 역사박물관에서는 올해 백제역사유적지구 세계유산 등재 4주년을 기념하여 무령왕릉 사진전이 열리고 있었다. 무령왕릉 사진전은 7월 9일부터 시작해서 10월 9일까지 만나볼 수 있다.
무령왕릉이 있는 송산리 고분군은 일찍 발굴이 되었다.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부터 진행되었는데 조선총독부박물관에 의한 공식 발굴은 1927년 10월, 1933년 8월과 11월 등 3회이고 나머지는 비공식 발굴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이때 많은 유물이 도굴되지 않았을까.
그리고 시간이 지나갔다. 1971년 송산리 고분군에서 6호분 봉토 북쪽 배수로 공사를 시작하다가 무령왕릉이 발견되었다. 백제의 왕릉 중 특정할 수 있는 인물의 무덤이 발굴된 것이었다. 무령왕은 백제 25대 왕으로 성은 부여, 이름은 사마, 시호는 무령이다.
462년 일본의 규수 가카라시마에서 태어나 501년(50세) 동성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대외적으로 고구려를 견제함과 동시에 수리시설을 정비하여 백성들의 생활안정과 국가재정을 확충하였으며 쌍현성을 쌓게 한 후 돌아와 62세의 나이에 사망한 무령왕은 왕비와 합장되어 무령왕릉에 묻히게 된다.
발굴된 무령왕릉은 한국의 삼국시대뿐만 아니라 고대 중국 및 일본의 최고 지배자 무덤 가운데 주인공과 축조 연대, 내부구조, 부장유물을 온전하게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무덤이라고 한다. 전혀 도굴되지 않은 채 발굴된 108종 4,687점의 유물은 백제의 사회 문화상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곳 공주에 자리한 충청남도 역사박물관은 예전에는 국립공주박물관으로 사용되던 곳이다. 오직 무령왕릉의 출토유물 전시를 위해 만들어졌다. 정부는 시설이 열악하다는 이유로 공주에 두지 않고 서울로 이용하려고 했지만 공주시민들의 반대로 그렇게 하지 못했다.
결국 국무총리의 담화 이후로 공주로 다시 돌아온 유물들은 중요 유물들에 대한 1차 정리 후 1971년 10월 처음으로 일반에 공개되었으며 1973년 10월 12일 무령왕릉 출토유물을 전시할 국립박물관 공주 분관 건물의 신축 개관식이 있었으며 1975년 국립공주박물관으로 격상된다.
세계유산에 등재된다는 소식을 상당히 오래전부터 들어왔다. 1993년 대전에서 EXPO가 열리고 다음 해인 1994년 무령왕릉 잠정목록이 등재되고 나서 20여 년의 시간이 흘러 2015년 드디어 백제역사유적지구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이곳에서는 송산리 고분군의 무령왕릉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찍은 생생한 사진들이 있다. 무령왕릉의 양식은 아치형 천장의 벽돌무덤으로 벽돌로 가로 쌓기와 세로 쌓기를 반복하여 네 벽을 쌓아 올렸다.
초기 발굴되고 나서 무령왕릉은 추가 발굴이 이루어진다. 1차 봉토 범위의 축조 방식을 밝히기 위한 구조조사 실시, 2차 무덤방의 천정과 벽면, 바닥에 대한 실측, 3차 널문 막음 벽돌을 모두 들어내고 문을 완전히 노출하는 듯 1971년 무령왕과 그 왕비에 대한 이야기는 세상에 알려진다.
지금 일본과의 관계로 인해 국민의 여론이 좋지는 않지만 무령왕이 탄생한 가카라시마와의 교류는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한다. 니리무세마는 무령왕이 태어난 섬이라는 뜻으로 백제 사람들은 가카라시마라를 부른 이름이다. 나리무는 임금이며 세마는 섬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