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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Aug 16. 2019

광복절

비 오는 날의 유관순 사적지

온전한 정부의 수립이냐와 정부 수립을 선언하고 조직을 갖춘 것이냐를 가지고 여러 말이 많지만 공통적으로 한민족만의 힘으로 국가가 수립되기를 바란 것은 동일하다. 15년 만에 한국은 독립기념관에서 대통령이 경축식을 했다. 아직도 여성 독립운동가로 주목받는 사람이 유관순으로 더 많은 여성 독립운동가가 있었지만 알려진 사람이 많지가 않다. 아마도 여성이 조선 말기에 가진 이미지에 대한 상징성이 그때까지도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신민에서 국민으로 바뀐 것이었지만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 있었다.

오래간만에 시원하게 비가 오는 광복절 유관순 사적지를 찾는 사람들이 있었다. 유관순 열사는 광복의 상징이 아닌 삼일운동의 상징이 되는 인물이다. 한일합병이 되고 나서 9년 만에 스스로의 힘으로 나라를 찾겠다고 일어선 비폭력 운동이었다. 전까지는 국가가 국민의 것이라고 생각하기보다는 특정 계층들에 의해 좌지우지된다고 생각했지만 나라를 빼앗기고 나서 비로소 일어난 것이다. 

일본이 한반도를 강점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근거에는 바로 그것에 있었다. 한반도를 점령한 것은 지배계층의 용인하에 승인되었고 그것에 불법성이 없다는 것이다. 일본과 한국의 정치는 다르다. 일본은 한국 같은 민주주의의 길을 걸은 적이 없다. 심지어 정권이 바뀐 적도 없다. 주권이 국민에게 있고 각각의 국민에게 권리가 있음보다 국가가 위에 있다. 일본에게 국가 간의 협약은 국가로서 용인되고 납득되어야 한다. 

오래간만에 유관순 열사 기념관으로 들어가 본다. 적지 않은 방문객들이 광복절을 맞아 그곳을 돌아보고 있었다. 

서울 종로 탑골공원의 만세시위를 시작으로 독립시위는 삽시간에 전국적으로 퍼져나갔다. 같은 날 같은 시각에 평양, 진남포, 안주, 의주, 선천, 원산 등 북한 지역에서도 서울과 비슷한 형태의 독립선언식과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삼일운동을 비롯하여 광복절 때까지 학생들의 역할은 적지 않았다. 삼일운동 때도 경의선과 경원선 열차를 이용하여 학생들이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비밀리에 전달을 했었다. 


삼일운동 당시 비폭력운동으로 전개되었지만 일제는 폭력으로 진압을 시작했다. 당시 일제는 정규군으로 육군 제20사단 및 제40 여단을 서울 서울 용산에, 제19사단을 함경북도 나남에 배치했으며, 제19사단 산하 제37여단을 함흥에 , 제39여단을 평양에 주둔시켰다. 이들 병력수는 23,000명에 달했으며 최신 무장을 한 일본 정예부대였다. 

유관순 기념관을 보고 위쪽으로 올라오면 유관순 열사의 영정이 있는 추모각이 나온다. 

광복절(光復節)은 말 그대로 회복하였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즉, 영예롭게 주권을 되찾았다는 뜻으로 쓰인다. 광복절 아침 여운형은 엔도 류사쿠 정무총감과 교섭을 벌여 5개 조항을 요구했고 이를 관철하였다. 

전국적으로 정치범, 경제범을 즉시 석방할 것.

서울의 3개월분 식량을 확보할 것.

치안 유지와 건국 운동을 위한 정치 운동에 대하여 절대로 간섭하지 말 것.

학생과 청년을 조직, 훈련하는 데 대하여 간섭하지 말 것.

노동자와 농민을 건국 사업에 동원하는 데 대하여 절대로 간섭하지 말 것.

광복절 당일 일반 국민들은 광복을 이해하는 사람은 적었다. 히로히토 천황의 항복 발표 방송은 잡음이 심했고 그 당시 쓰던 일본어도 아니고 일본 황족어로 나왔기 때문에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들은 극소수였다. 광복이 되고 나서도 일본의 일본군들은 미군에 의해 무장해제되는 9월 9일까지 시내를 돌아다니며 해방을 환호하는 군중들에게 집으로 돌아가라고 지시하느라 분주하게 움직였다. 이때 일본인들은 한반도에서 취득한 자산이나 문화재를 가지고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하는 것처럼 광복절이 있는 8월 15일 순식간에 일본이 모든 권리를 포기하고 나간 것은 아니었다. 마치 협약을 하듯이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에게 포기하겠다고 선언한 날이나 다름이 아니었다. 

갑자기 찾아온 광복은 많은 혼란을 야기한 것은 사실이다. 준비가 되지 않기도 했지만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비롯하여 미군에 의해 훈련받은 한국군들이 바로 들어오지 못하게 된 것도 이유가 된다. 해방 연도인 1945년을 광복절 원년으로 계산하여 올해로 제74회를 맞이했다. 비가 오는 날이었음에도 유관순 열사 사적지를 찾아 광복절의 의미를 찾는 한국인들이 있기에 그 혼란은 종식되고 하나가 되어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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