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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Aug 22. 2019

사랑스러운 미소

사천 곤양면의 비자나무 (천연기념물 제287호)

그 쓰임새가 너무 귀해서 이제는 이 나무로 무언가를 만들 수가 없다. 나무가 좋아서 그런 것인지 모르겠지만 사천 곤양면의 비자나무의 꽃말은 소중과 사랑스러운 미소다. 그 귀중한 가치만큼이나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것이 여러 나무가 있다. 사천에 자리한 곤양면의 비자나무는 제287호, 제39호인 전남 강진군 병영면의 비자나무, 제111호인 전남 진도군 임회면의 비자나무, 제153호인 전남 장성군 북하면의 비자나무, 제239호인 전남 고흥군 포두면의 비자나무숲, 제241호인 전남 해안군 해안읍의 비자나무숲 등이 있다. 

이 곳 주변에는 면사무소가 있는데 면사무소가 있던 곳에는 관아가 있었다고 한다. 형을 집행하는 형방이 있던 곳 앞에 비자나무를 심었는데 그것이 자라서 오늘에 이르렀는데 수령이 300년을 넘었다. 높이 20미터에 근경 둘레가 5미터이며 천연기념물에 걸맞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순신은 이 길도 걸어갔던 모양이다. 남해에는 하동을 비롯하여 사천, 고성 등으로 백의종군로가 있다. 조선시대 관리들이 의식에 참가할 때 복장은 금관조복(金冠朝服)이었는데 무관이 입는 철릭·협수·전복(戰服) 등 군복은 다양한 문양을 넣어 화려함이 더했다.  일반 백성은 대개 흰옷을 입었는데 ‘백의(白衣)’는 벼슬하지 않은 사람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즉 벼슬이 없이 군대에 복무하게 되니까 직책에 맞는 옷이 없고 따라서 일반 백성들이 입는 흰색 옷을 입을 수 있었다. 

사천의 곤양군은 세종이 즉위한 해인 1419년에 남해현과 곤명현을 합하여 곤남군이 되었고 이후 곤양군이 되었는데 여기에는 많은 군수들이 재직하였다. 유적 중 비석 29기와 자연석에 음각한 대 2기가 현존하고 있다. 

비석군은 곤양초등학교(옛 객사) 앞에 있던 것을 1975년 이곳으로 옮겨 놓은 것이라고 한다. 

비군을 보고 위쪽으로 올라오면 천연기념물이라는 곤양면의 비자나무가 나온다. 노란색의 목재는 부식되지 않아 가구·상자·조각 및 선반의 재료로 쓰이는데 바둑판 중에서 비자나무로 만든 바둑판은 최상품으로 취급된다. 집에 비자나무로 만든 바둑판 하나 정도 있으면 보물처럼 여겨진다. 

위쪽에서 비자나무를 만나는 것은 어렵다. 남쪽에 가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동백나무처럼 비자나무도 따뜻한 곳에서 자라는 나무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약 20세가 되면 성장을 거의 멈추고 노화의 길로 가는 것이 사실이다. 모든 나무의 특성이지만 씨에서 돋아나 생을 마감할 때까지 한순간도 성장을 멈추지 않고 자라면서 계속 씨를 맺어 후손을 남기는 노력을 한다.

나무는 끊임없이 자랄 수 있지만 사람은 오직 생각만이 끊임없이 자랄 수가 있다.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새로운 나이테를 만들어 지나온 햇수를 셈하는 것처럼 사람도 나이가 들어가면서 새로운 정신적인 나이테를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사천 곤양면의 비자나무를 보고 내려오는 길에 아까 만나보았던 백의종군로를 살펴본다. 이순신 장군은 두 차례나 백의종군(白衣從軍·벼슬 없이 군대를 따라감)을 했다. 두 번째는 부산에 있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왜군(倭軍)을 공격하라는 조정의 명령을 전략상 판단으로 따르지 않아 파직된 후 백의종군을 하며 이곳 사천지역을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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