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는 누군가 Aug 25. 2019

사람이 살던 곳

서산에 사람이 같이 살던 해미읍성

일제강점기에 가장 많이 사라진 것은 평평한 지역에 자리했던 읍성들이다. 제주시의 제주읍성도 그때 헐렸고 청주의 읍성을 비롯하여  부(府)·목(牧)·군(郡)·현의 행정구역단위의 등급에 따라 만들어진 읍성이 모두 헐렸다. 역사적으로 훌륭한 우리의 관광자원이 사라진 것이다. 남아 있는 읍성으로는 해미읍성을 비롯하여 비인 읍성·남포읍성·홍주성·보령 읍성·남원 읍성·고창읍성(일명 모양성)·흥덕 읍성·낙안읍성·진도 읍성·경주읍성·진주 읍성(일명 촉석 성)·언양읍성·거제 읍성 정도다. 

무언가의 시작은 화창한 하늘처럼 맑았다가 중간에 흐려지기도 하고 하루의 마무리를 할 때면 갑자기 비가 내릴 때가 있다. 인생에서 일희일비는 자신만을 괴롭히는 법이다. 

해미읍성은 1418년(태종 18) 충청도에 설치된 두 개의 병마절도사영(兵馬節度使營) 중 하나로 1491년(성종 22)에 완성되었으며, 사적 제116호로 되어 있다. 염조포(鹽祖浦) 부근에 안회산(安回山) 봉수가 있어 서산의 북산(北山) 봉수를 받아 면천(沔川)의 창택산(倉宅山) 봉수와 연결되었던 곳이다. 

고대국가부터 백제, 통일신라, 고려, 조선에 이르기까지 이곳은 매우 중요한 요충지로 자리했었다. 해미가 중요 거점으로 자리하게 된 가까운 역사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덕산에서 해미로 충청 병마도절제사 영이 이설 되고 이어 해미읍성은 1491년(성종 22)에 축조되어 서해안 방어를 맡으면서부터이다.

근대화를 말하면서 지역마다 자리한 읍성을 허물었던 일본을 실제 가보면 역사적인 흔적을 잘 보존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종묘와 왕궁이 있는 도성(都城), 낙랑의 치소(治所)였던 토성,  옹성(甕城 : 문의 양쪽에 쌓아 문을 공격하는 적을 방비하는 것)과 치성(雉城 : 성벽의 바깥에 네모꼴로 튀어나오게 벽을 쌓아 성벽에 바싹 다가선 적병을 비스듬한 각도에서 공격하게 하는 시설)·해자(垓字 : 성벽의 둘레에 도랑을 판 것)등은 모두 방어와 공격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사람이 사는 안전한 곳을 만들기 위함이기도 했다. 

고려시대에는 주요 지방도시에 읍성이 축조되었으며 고려시대의 읍성들은 조선왕조에 이어졌으며, 차츰 석축(石築)으로 고쳐지거나 호구(戶口)의 증가에 의해서 넓게 고쳐 쌓는 작업이 진행되었다.

삶을 위한 공간이었지만 적이 쳐들어올 때면  이들 읍성들은 현재까지 남아 있는 주변의 산성들로 보아서는 유사시에는 인근의 산성에 입보(入保:안에 들어와 보호를 받음)할 수 있는 것들로 보인다. 반지의 제왕 두 번째 작품에서 보면 평지에 자리한 로한 왕국에서 방어와 공격을 할 수 있는 산성인 헬름 협곡으로 이동하는 것과 유사하다. 

정치학자나 역사학자, 사회학자 등은 기를 특정시대 및 지역문화를 나타내는 인공물로 인식한다고 한다. 어떤 나라의 기가 다른 나라의 기보다 위에 있으면 위에 있는 나라가 승리한 것을 나타내므로 평화시에 한 나라의 기를 다른 우호적인 나라의 기 위에 게양한다는 것은 모욕이다. 

시간이 참 빠르게 지나가고 화창했던 아침의 햇살은 이렇게 서산 앞바다의 노을로 변해간다. 지금 모든 것을 갖추고 내리막길을 걷는 것보다 조금 부족하지만 미래에 조금 더 나아질 것 같은 느낌이 있을 때 사람들은 더 동력을 얻는다고 한다. 다음에 찾아가면 서산의 해미읍성은 어떤 느낌으로 다가올지 생각해본다. 


매거진의 이전글 공부하는 자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