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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Aug 29. 2019

고려 3대 국찰

안성에 남아 있는 국찰 봉업사지

고려가 국교로 삼은 것은 종교로서 불교이고 조선이 국교처럼 생각한 이념은 유교이다. 두 국가 간의 차이는 과연 무엇일까. 후삼국시대에 혼란을 잠재우고 전쟁의 화마를 치유해줄 수 있는 마음의 안식이 필요했는데 그것을 해소해줄 역할이 바로 불교였다. 그렇지만 초기의 좋은 제도도 시간이 지나면 망가지고 고칠 필요가 있듯이 고려말에 권문세가에 의한 백성의 고혈을 짜는 혼란의 시기를 뒤엎을 이념적인 기준이 필요했다. 그것이 성리학으로서의 유교의 역할이었다.

안성에 자리한 봉업사(奉業寺)는 8세기 중엽에 창건되었으며 9세기 중반인 854년경에는 화차사(華次寺)라 불렸다고 한다. 신라 말 죽주 출신 호족 기훤과 궁예의 후원을 받았던 것으로 보고 있다. 지금은 대사찰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지만 기록을 살펴보면 능달명(能達銘) 기와의 명문에 의하면 청주 출신 호족 능달이 태조 왕건의 명을 받아 죽주 호족세력의 지원으로 청주 출신 장인을 동원해 절을 중창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그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대표적인 유물로는 절의 앞에 세워지는 당간지주와 뒤에 서 있는 오층 석탑이다. 고려시대 왕건의 진영을 모신 3대 국찰은 개경의 봉은사(奉恩寺), 논산의 개태사(開泰寺), 안성의 봉업사다. 개경은 가볼 수가 없으니 모르겠고 논산의 개태사는 자주 가서 잘 아는 편이다. 절터에서 수습된 와편의 ‘開奉’이란 명문이 매우 주목되는 이유는 왕건의 진영과 연관 있는 ‘개(開)’와 ‘봉(奉)’ 두 글자를 다 갖추고 있다.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았던 안성 죽산리 당간지주는 현재 위치에 그냥 쓰러져 있었다고 한다. 그러던 당간지주를 1980년에야 바로 세워 복원하였다고 한다. 전체적인 형태로 볼 때 당간지주가 처음 세워진 시기는 안성 봉업사와 같은 고려 전기로 보고 있다. 

개경은 모르겠으나 논산의 개태사나 안성의 봉업사는 고려의 국찰이니만큼 그 위세나 의미가 상당했을 것이다. 두 사찰의 공통점은 바로 절터만 남아 있다는 점이다. 아마도 조선의 개국과 숭유억불정책에 의해 고려를 상징하는 국찰이 폐사가 된 것이 아닐까란 생각을 해본다. 

뒤에 남아 있는 오층 석탑은 단층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부(塔身部)를 형성하고, 정상에 상륜부(相輪部)를 장식한 방형중층(方形重層)의 일반형 석탑으로 여러 개의 판석(板石)으로 구성된 지대석(地臺石)이 놓이고 그 위에 기단 면석(面石)이 놓였는데, 면석은 각 면 1석씩으로 짜였으나 서쪽 면만은 2매의 판석으로 되어 있다. 


이 사찰 터에서는 우리나라에서 단일 유적으로는 가장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통일신라시대 목탑 터 등 건물터 28곳, 통일신라에서 고려에 이르는 막새기와 220여 점, 고려 광종 대의 독자적인 연호인 ‘준풍(峻豊)’·‘건덕(乾德)’ 등이 새겨진 명문 기와 40여 종 500여 점, 청자, 중국 자기 등이 출토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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