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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Sep 03. 2019

청빈 (淸貧)

경남 고성의 청빈 정치인 제정구

금수저, 은수저, 동수저, 흙수저의 등급을 나누며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기도 했던 사회 분위기는 아직도 그대로인 듯하다.   옛사람들은 재물이 아니라 마음이 가난한 것을 부끄러워했고, 죽은 후에 남길 것은 맑고 아름다운 이 삶의 원칙밖에 없었다고 살기도 했다. 요즘 시대에 청빈하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단순히 가난하게 사는 게 아니라 자신의 의지로 선택하는 간소한 삶이며, 소유의 욕망을 최소화하는 다소 멋스러워 보이는 삶은 아니라고 생각할 것이다. 

어떤 이가 태어나고 그 생가가 보존된 집중에 경남 고성의 제정구 선생의 집은 가장 초라하고 관리가 안되고 있었다. 그의 전시전에 대해 글을 쓴 적도 있어서 그 발걸음을 알고 있다.  서울대학교에 입학했다가 1971년에 복학했으나 곧바로 교련반대 시위로 제적당하였다. 1972년 봄 청계천 할빈 교회의 김진홍 목사를 만나 ‘산 자가 올 수 있는 가장 막다른 골목’인 청계천 판자촌에서 배달 학당의 야학(夜學) 선생을 맡게 된다.  

대부분의 386세대들이 정치의 민주화는 외쳤어도 경제의 민주화를 외친 사람은 많지 않다. 제정구 선생은 판자촌 생활에 큰 충격을 받아, “판자촌을 나 몰라라 하며 진리·정의·민주주의를 외친다는 것은 공허한 외침에 불과하다며 평생을 빈민운동에 투신하기로 한다. 

제정구 선생의 집은 처음 찾아와 본다. 이건 생가가 아니라 거의 폐가 수준이었다. 실제로 온전하게 보존되고 있다고 하더라도 무척 소박한 집이다.  그는 두려움과 압제 등에 대해서 이렇게 말을 했다. 두려움은 극복할 수 없어서 참는 것이다. 신을 믿는 것이 두려움을 견디는데 의지가 될 수는 있지만 안 무서워지는 것은 절대 없다. 

이곳에서 밥을 해서 먹고 삶을 살았던 그때의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국회의원을 몇 번이고 했지만 그의 재산은 좀처럼 늘어나지 않는 삶이었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15년형을 선고받을 땐 최후진술에서 “제가 죽어 나라가 잘되면 기꺼이 죽겠습니다. 사형에 처해 주십시오”라고 외치기도 했다. 정치민주화는 어떻게든 이루었으나 언론과 경제민주화는 아직 갈길이 멀다.  먹고살기 힘들면 백성이 사나워진다고 했던가. 그는 무엇을 먼저 해야 하는지 알았던 사람이긴 하다. 

1999년 폐암으로 사망한 뒤 민주화와 도시빈민을 위해 투쟁해 온 공적을 인정받아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모란장을 추서 받았으며 일생을 빈민운동에 헌신한 그를 두고 한국 천주교회의 김수환(金壽煥) 추기경은 ‘메마른 땅의 한 줌의 소금’과 같은 인생이라고 칭송하기도 했다. 청빈한 정치인의 삶이 어떤지 완전히 이해하기는 쉽지 않겠지만 이런 사람이 있기에 조금씩 민주화는 나아가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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