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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Sep 06. 2019

고성에서 만난 이간

고성 덕산 서원에 모셔진 이호성, 이희, 이간

지어진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곳에 모셔진 사람 중 잘 알고 있는 사람인 이호성과 이희, 이간이 있었다.   경내에는 정면 4칸, 측면 1칸 규모의 서원 건물과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된 덕산정, 팔각정, 관리사 등이 있는 덕산 서원은 1979년 이학두가 선조들을 기려 부지 3만 3,000㎡에 조성하였는데 원래 있던 서원은 고종대 대원군의 서원 훼철령에 의해 없어졌다. 

우연하게 지나가다가 덕산서원을 알리는 비를 보고 그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정무공 이호성과 벽사공 이간, 이희를 모신 덕산서원은 봄에 만개하는 벚꽃으로 고성주민들은 이곳에 찾아와 봄 향기를 맡는다고 한다.  

거제도에는 남해바다를 방어하기 위해 고려 때부터 성을 쌓았다. 이호성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40여 년 앞서 거제현령으로 부임하게 되는데 읍(邑)을 옮기고 성을 새로 쌓아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한편, 국방을 튼튼히 한 공으로 이듬해 문종이 즉위하자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에 임명되었다. 

덕산서원 입구 쪽에 오면 효자였던 성산 이공종우 사적비와 함께 뒤쪽에는 정무공 이호성, 병사공 이공 신도비가 있으며 이호성은 병조판서, 이간은 경상좌도병사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보통 효자는 효자각을 세우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렇게 비를 세운 것은 오래간만에 보았다. 

병사공 이간은 숙종대의 인물 이간과 같은 이름인데 다른 시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살았지만 앞선 시대의 이간은 무에 능했고 아산의 이간은 문에 능했던 사람이다.  외암 이간은 적지 않은 학식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벼슬길에 오래 있지 않았다. 일생의 대부분을 아산 외암마을에서 머물렀는데  ‘인간과 사물의 본성은 같은 것(人物性同論)’이라는 입장을 견지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옆에는 숲이 조성되어 있고 덕산서원이라는 비를 둘러보면서 안쪽으로 걸어서 들어가 본다.  

덕산서원으로 들어가는 입구의 외삼문은 일신문이라고 걸려 있다.  이희(李僖)의 본관은 성산(星山)이고. 자(字)는 사선(士善)이며 호는 가은(伽隱)이다. 벼슬이 선교랑(宣敎郞)에 이르렀다. 효성이 지극하여 8세에 부친상(父親喪)을 당하매 슬퍼함이 성인과 같았다고 한다. 

덕산서원에 모셔진 이호성과 이간은 공통점이 있다. 둘 다 강직하고 청렴하였다는 것이다.  이호성은 성품이 강직하고 청렴하며 기사(騎射)에 능하고 또한 이치(吏治)에 수완이 있었다 한다. 일찍이 최윤덕(崔潤德)의 북정(北征) 때 편비(褊裨)로 이름을 떨쳐 비장군(飛將軍)이라 불렸다고 한다. 

이간(李侃)은 1535년생으로, 자(字)는 사집(士集)이며 호는 해사(海槎)이다. 1569년 창신교위 행충무위 부사직(彰信校尉 行忠武衛 副司直)하고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의령과 함안(咸安)에 진을 치고,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1552~1617)장군과 더불어 앞뒤에서 적군을 공격하여 남강을 건너지 못하게 하여 경상우도를 지켰다. 

덕산서원이 자리한 두호마을은 2010 참 살기 좋은 마을 가꾸기 사업에 선정되어 조성된 곳이기도 하다.  이곳의 지형이 머리처럼 바닷가에 내밀어 임란 당시 당항포해전에서 패한 외적의 목이 소소강을 따라 밀려 왔다고 하여 머리개라 부르기도 했던 곳이기도 하다. 

덕산서원은 백두대간(白頭大幹)의 정기(精氣)가 여러 봉우리를 만든 후 다시 낮아진 덕주봉(德注峰)의 줄기가 북쪽으로 꾸불꾸불 뻗어가다가 새가 날개를 좌우로 편 듯하고 송황(松篁)과 연수(煙樹)의 사이 은영(隱映)하는 곳에 그윽한 정기가 모여 일구를 이룬 명당에 위치한 곳이다.  덕산서원은 마을의 이야기들이 곳곳에 새겨져 있는 곳에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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