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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Sep 11. 2019

척화(斥和)와 주화(主和)

논산 윤황 선생 고택에서...

개인대 개인 혹은 조직대 조직 나아가서 국가대 국가가 싸움이나 전쟁을 하는 것은 지피지기(知彼知己 )가 되어야 한다.  상대방을 알고 나를 알아야 싸움을 시작할지 시작하지 않을지를 결정을 할 수가 있다. 여기에 하나가 더 해진다면 바로 명분이다.  명분이 있다 하더라도 힘이 없다면 싸움을 시작할 수 없으며 명분이 없다 하더라도 힘이 있다면 싸움을 할 수가 있다.  그러나 명분도 없고 힘도 없는데 싸움을 하는 사람이 있으며 명분도 있고 힘도 있는데 싸움을 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  이는 모두 나와 상대방을 알고서야 올바른 판단이 서는 것이다.  


살다 보면 상대방을 전혀 알지도 못하면서 싸움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은 경고를 해주어도 그 경고를 알지 못한다. 자신의 상황이나 능력과 상대방의 상황이나 능력을 비교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필자는 상대방과 나를 판단했을 때 우위에 있으며 명분이 있을 때 움직인다.  우위에 있으며 명분이 있어도 그걸로 인해 얻을 수 있는 소득이 작을 때는 무시한다.  잘못되었음을 알았을 때는 빨리 잘못을 시인한다.  잘못을 시인하는 것은 약함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다음을 기약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는 것이다.  

조선의 역사 속에서 척화(斥和)와 주화(主和)가 극명하게 드러난 것은 임진왜란, 정묘호란, 조선 말기였다.  시기적으로 세 역사적 사건의 공통점은 조선은 자신이 가진 힘이 어느 정도인지도 몰랐고 상대방이 가진 힘의 수준도 알지 몰랐다는 사실이다.  오로지 의미 없는 명분을 지키려는 사람들만 가득했다.  임진왜란 당시 의미 없는 우월함을 가지고 있었으며 정묘호란 때는 명나라에 대한 의리라는 명분만 지키려고 했다.  조선 말기에는 서양을 무시하며 쇄국을 주장했다.  힘이 있을 때 척화와 주화를 주도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힘이 없어도 명분을 위해 척화를 해야 할 때가 있다.   1597년(선조 30) 알성 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승문원권지정자(承文院權知正字)에 임명되었으며 1608년(광해군 즉위년) 북청판관으로 혼인한 자제를 거느리고 관아에 머물고 있다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으며, 광해군의 정치가 문란해지자 시골에 은거하였다.

논산에 자리한 윤황 선생 고택은  ㅡ자형 사랑채, ㄱ자형 안채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체적인 형태는 트여 있는 ㅁ자형 평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고택의 구성은 안채, 사랑채, 광채 등 3채의 살림집과 사당 1채로 되어 있다. 윤황 선생은 청나라가 쳐들어올 때 화친을 반대하는 척화 파였다.  영화 남한산성에서 보듯이 청나라라는 대세를 조선이 막을 수는 없었다. 물론 임진왜란 당시 도와준 명나라에 대한 의리라는 명분은 있었지만 백성을 생각하면 척화보다 주화가 현명한 선택이었다.  

본관은 파평인 윤황은 자는 덕요이고 호는 팔송인 윤황은 인조 때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주화를 반대하다가 인조의 노여움을 사 유배의 명을 받았으나 삼사가 주청 하여 화를 면하였다. 윤황 선생의 호가 팔송인 이유는 그가 살던 곳이 남별영이 있던 곳으로 소나무 8그루가 둘러싸여 있고 샘이 있어 팔송정이라고 불렀는데 그 명칭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새로 쌓은 축대를 기준으로 우측에는 윤황 선생의 사당이 위치해 있는데 제사등을 지낼 때 사랑채에서 바로 올라갈 수 있는 동선으로 구성해 두었다. 

정면에서 보면 좌측에 부엌과 안방이 있고 ㄱ자형으로 꺾인 안채에는 대청, 건넌방이 위치해 있다. 윤황 선생의 고택은 우측 맨 끝방에 높임 마루를 둔 곳이 특징이다. 윤황은 인조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대에는 동부승지(승정원(承政院)의 정삼품 벼슬. 여섯 승지(承旨) 가운데 끝자리로, 공방(工房)의 일을 맡았다), 이조참의(이조(吏曹)에 속한 정삼품의 당상관(堂上官) 벼슬. 이조 참판(吏曹參判)의 아래이다), 전주부윤(지방관청인 부(府)의 우두머리)을 지냈다. 

논산시 노성면 장구리 52에 위치한 이 고택은 윤황 선생의 6대손 윤정진이 조선 영조 때 지금 자리로 옮겨 종가로 내려오고 있다고 한다. 윤황은 사후에 영의정까지 추증되었다.  사후에 영광의 용계사우(龍溪祠宇), 영동의 초강서원(草江書院), 노성의 노강서원(魯岡書院)에 제향 되었다. 윤황은 사람됨이 강의(剛毅)하고 기절(氣節)이 있다는 평을 들었으며 명분을 중요시했던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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