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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Sep 30. 2019

관직 (官職)

한적한 날 돌아본 사계 김장생 고택

추석이 있는 9월도 뭔지 모르게 무척이나 바빴다. 9월의 마지막 날인 오늘 역시 그러하다.  지난주에 논산을 찾았다가 오는 길에 계룡시의 한 고택을 찾았다. 예학의 거두였으며 수많은 학자들에게 영향을 미쳤으며 논산과 대전에 자리한 광산 김 씨, 파평 윤 씨, 은진 송 씨의 가문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던 사람이었다. 같이 간 지인이 어느 시대에 살았냐는 물음에 굳이 중간지점을 꼽으라면 임진왜란이라고 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해는 1592년이다. 흔하게 거론되는 십만 양병설을 이야기했다는 이이의 이야기를 듣고 김장생은 나라에 큰일이 터질 것이라고 예견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시인으로 잘 알려져 있는 송강 정철은 김장생에게 대간에서 전조(銓曹)가 일찍이 정여립을 외직으로 천거한 것을 논하여 벌주고자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대해 물은 적이 있다.  그 물음에 김장생은 결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전관(銓官)이 어찌 그가 장차 모반할 것을 알았느냐며 반대한다. 그는 관직에 큰 비중을 두지 않았으며 계속 관직이 내려졌으나 부임하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김장생 고택 앞에 심어져 있는 감나무의 감이 익어가고 있었다.  김장생은 배움에 있어서 스승과 학문을 가리지 않았다. 그의 스승 중 대표적인 학자는 율곡 이이였지만 그의 사상 세계에 새로운 생각을 부여한 사람은 토정비결(사실 이지함이 쓰지 않았지만 관련은 있다.)의 이지함이기도 했다. 보령에 가면 토정 이지함의 묘가 있는데 이지함은 보령에서 가난한 백성들을 살피기 위해 소금을 굽고 있었다.  

오래간만에 사계 김장생 고택의 뒤쪽으로 들어와 보았다. 지인과 둘 만이 있는 이 공간에서 저 앞에 있는 건물은 박물관 공간처럼 활용되고 있는데 이날은 시간이 지나서 닫혀 있었다. 얼마 전 판도라의 상자를 이야기한 덕분인가 지인은 저 문안 쪽이 궁금했는지 바로 열어보았다. 덕분에 경고 메시지를 들으면서 돌아다닐 수 있었다. 

정통이라는 것이 무엇일까.  김장생은 사회를 바로 서게 하는 것은 통(統)을 바르게 하는 것이고 이를 '정통'(正統)이라 하였다. 얼마 전 어떤 정치인이 머리를 깎는 것을 유학에 비한 바가 있는데 유교에서는 절대로 머리를 깎는 것은 자신의 강력한 의지 표현이라고 하지 않는다. 유학의 유자도 모르는 사람이 떠드는 것이다. 정통의 학자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어릴 때 아버지가 삭탈관직을 당하는 등의 사건을 겪으면서 그는 어린 시절부터 과거에 합격하여 관직에 진출하는데 인생의 목표를 두지 않았다. 

그의 생각과 영향력은 인조반정을 통해 왕위에 오른 인조의 정국을 서인 중심으로 안착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정권을 잡은 세력이 그렇듯이 훈구세력이 되어가며 기득권을 지키는데 권력을 남용한다. 서인은 그렇게 훈구세력이 되어갔다. 그러나 김장생은 부패와 권력남용을 일삼는 서인 공신 세력과 거리를 두어 남인, 북인이 그를 공격할 수 없었다.

벌써 이렇게 벼가 익어가고 있었다. 책이란 계속 읽으면서 그 숨은 뜻을 곱씹는데 의미가 있다. 김장생은 처음부터 끝까지 늘 한결같으면서 소학(小學)을 학자의 기본으로 믿어 행했고, 밤마다 중용․대학․심경․근사록 등 서적을 돌려 가며 읽고, 다시 읽고 여러 번 읽고 암기하였다.

사계 김장생 고택에서는 매년 사계고택 인문 음악회를 연다. 올해의 사계고택 인문 음악회는 ㅇ지난주 토요일에 열렸다. 인문 음악회가 열릴 때면 사계 고택 앞에서 플리마켓이 펼쳐진다.  

영어로 플리마켓이지만 우리말로는 벼룩시장이다. 벼룩시장에는 그 지역만의 생동감 넘치는 인간미와 그들의 문화가 늘 함께 있다. 규모는 그렇게 크지는 않지만 이날 핸드 메이드 액세서리뿐만 아니라 신선한 채소와 과일 등 없는 게 없을 정도로 다양한 것들을 먹어보고 구매할 수 있었다. 


논산의 강경에 가면 죽림서원이라는 곳이 있다. 지금은 죽림서원이지만 사계 김장생은 그곳으로 내려가 황산 서원을 세웠는데 자신도 그곳에 배향이 된다. 그 황산 서원이 지금의 죽림서원이다.  그는 인조반정 당시 반정공신들에게 중종반정 공신들의 과오를 되밟지 말도록 충고하였으며 권력남용과 부패 행위를 하지 말라고 하였다. 중종 당시 반정공신들인 훈구파의 패악이 심해지자 신진 사림파는 이를 타계하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기묘사화로 화를 입게 된다. 


 "인심이 만족한 뒤에야, 가히 뒷 날에 할 말이 있고, 선생과 친구를 배반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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