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유가 살았던 쌍청당
지인들이 많이 모여사는 곳의 이름이 송촌동이다. 송 씨가 많이 모여 살았다고 이름이 붙여진 송촌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역사를 안다면 새롭게 조성된 주거단지의 학교보다 오래된 지역명을 사용하는 학교가 더 의미가 있다. 예를 들면 회덕중학교 같은 곳이다. 회덕이라는 곳은 대전의 중심이었으며 은진 송 씨를 회덕 송 씨라고 부를 정도로 의미가 있는 지명이다. 은진 송 씨들이 송촌동에 모여 살며 자손들이 대를 이어서 살게 된 것이 언제일까.
송촌동에 보존이 되고 있는 고택 쌍청당은 이 지역이 송촌이라고 불려지게 하는 최초의 인물이었던 송유가 살던 곳이다. 고령 창왕 원년(1389)년에 진사 송극기와 고흥 유 씨 사이에서 태어나 태조대에 벼슬에 올랐다.
쌍청당이 왜 이곳에 자리하게 되었지를 알리는 쌍청당기가 있다. 스토리가 흐르는 정려의 길은 조선왕조의 개국과도 연관이 있다. 송유가 벼슬을 버리고 내려오는 일이 조선 개국에 공을 세운 신덕왕후가 태조의 묘에 모셔지지 않자 이곳으로 낙향한 것이다.
신덕왕후는 고려 말기 권문세족의 배경을 가진 강 씨는 이성계의 둘째 부인으로, 위화도 회군을 할 당시에는 포천 철현(鐵峴)의 전장(田莊)을 맡아 살림을 따로 하고 있었다. 신덕왕후의 친가는 이성계의 권력 집중과 조선 개국 과정에서 중요한 임무를 수행했다는 많은 일화가 전해오고 있다.
쌍청당 앞에 감나무에서 감이 먹음직스럽게 익어가고 있다.
신덕왕후가 조선역사상에서 오랫동안 종묘에 배향하지 못한 것은 왕자의 난으로 권력을 잡고 왕위에 오른 이방원 때문이기도 했다. 그가 왕자의 난으로 쳐낸 왕자 이방번(李芳蕃)·이방석(李芳碩)이 바로 신덕왕후의 소생이었기 때문이다.
송유는 도가 아니라고 생각해서 낙향하여 이곳에 살며 집 동쪽에 사당을 짓고 집 서쪽에 가묘를 두고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사당의 동쪽에 별도로 7칸짜리 건물을 지어 학문을 연구하던 건물이 쌍청당이다.
쌍청당의 왼편에 있는 원일당이 송유가 어머니 고흥 유 씨와 함께 살았던 곳이다. 지금 대청호 상류에 가면 송명의 유허비와 고흥 유 씨의 묘가 자리하고 있다.
시간이 흘러 1669년(현종 10) 2월 판중추부사 송시열(宋時烈) 등은 정릉과 흥천사기문(興天寺記文)이 갖추어 있음을 지적하면서 신덕왕후를 종묘에 배향해야 한다는 차자(箚子)를 올렸다. 신덕왕후는 이로써 이 해 9월 강 씨의 기신제가 8월 11일로 고정되어 200여 년만에 복구되었다.
집과 집으로 이어지는 공간에는 마치 작은 정원처럼 조성이 되어 있어서 모기만 없다면 살짝 부러운 느낌마저 든다. 숲이 있기에 다양한 생물이 공존할 수 있는데 익충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해충도 있을 수밖에 없다.
아직도 푸르른 기운이 남아 있어 2019년이 넉넉히 남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곳은 송유의 후손들이 살고 있기에 평소에는 문이 닫혀 있지만 낮에 벨을 누르고 돌아보고 싶다고 말하면 열어준다고 한다.
옛날에 이 부근을 부르는 지명은 쌍청당이 있는 마을을 윗중리, 백달촌 또는 하송촌이라 불렀는데 마을 동쪽은 상송촌으로 동춘당과 고택이 자리하고 있다. 은진 송 씨 혹은 회덕 송 씨라고 말할 정도로 가문의 이야기를 후대에 전해주고 있는 중심 공간에는 쌍청당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