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미정

선비의 향기가 스며든 곳


채미정은 고려에 충절을 지켰다는 삼은(三隱) 중 한 명인 길재의 정신이 내려오는 곳이다. 고려 말에서 조선 초기의 학자로 그는 야은(冶隱), 또는 금오산인(金烏山人)이라는 호를 즐겨 사용했다고 한다.


채미정이라는 곳은 사람됨을 살필 수 있는 고택이자 정자가 있는 곳이다. 사람됨을 살피는 데는 눈동자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 눈동자는 그 사람의 악을 감추지 못하다. 마음이 바르면 눈동자가 맑고, 마음이 바르지 않으면 눈동자가 흐리다.

좋지 않은 말을 하는 경우를 네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고 한다. 편파적인 말을 들으면 그 말을 하는 사람이 어떤 것에 의해 가려져 있음을 안다. 도를 지나친 말을 들으면 그 말을 하는 사람의 마음이 어떤 것에 빠져 있음을 안다사특한 말을 들으면 그 말을 하는 사람이 올바른 도리에서 벗어나 있음을 안다. 둘러대는 말을 들으면 그 말을 하는 사람이 궁지에 빠져 있음을 안다.

채미정은 1768년(영조 44)에 창건되었으나, 1977년 구미시에서 건물을 보수하고 경역을 정화하는 사업을 크게 시행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앞에 물이 흘러가듯이 뒤의 물은 자연스럽게 따라서 흐르게 된다. 당대의 지식인이 해야 될 것이 있는데 잘난 사람, 중용의 덕을 지닌 사람과 재능을 지닌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을 가르치고 이끌어 주어야 한다. 그것이 그들이 지닌 사회적 역할이고 의의라고 한다. 못한 사람들을 외면하고 내버려 두는 것은 그들이 지닌 중용의 덕과 재능에 대한 사회적 요구를 외면하는 것이라고 한다.

오백 년 도읍지를 필마(匹馬)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依舊)하되 인걸은 간 데 없다
어즈버 태평연월(太平烟月)이 꿈이런가 하노라
- 길재, 〈회고가(懷古歌)〉

이런 형태의 정자는 문경인가를 가서 본 기억이 난다. 사찰에서 사용된 건축물인데 한국에서는 찾아보기 쉽지 않은 형태의 건물이다. 채미정은 벽체가 없고 16개의 기둥만 있는 정자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한식 건물로 한가운데 1칸을 방으로 만들고 ‘ㅁ’ 자로 우물마루를 두른 건물이다.

채미정에서 '채미'는 고사리를 캔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인의를 저버린 군주, 새로운 왕조를 섬길 수 없다며 불사이군(不事二君)을 고집한 백이와 숙제는 야은 길재가 사표(師表)로 삼고자 한 인물이기도 하다. 앞서 말한 것처럼 중용의 덕을 지닌 길재는 시골로 돌아와 학문에 정진을 하게 된다.

세속의 현달에 뜻을 두지 않고 성리학 연구에 매진했기 때문에 그를 본받고 가르침을 얻으려는 학자가 줄을 이었다고 한다. 대인은 어린아이의 마음을 잃지 않은 사람이라고 하는데 그러고 보면 극으로 가다 보면 아이와 닮아지고 싶은 사람들이 적지 않았던 것을 알 수 있다. 피카소는 평생을 아이와 같이 바라보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옳은 것을 바르게 행하되 그에 따른 이익을 도모해서는 안되고, 도리를 밝히되 그에 따른 성과를 따져서는 안 된다." - 동중서

충절을 지키며 오직 학문에 정진한 야은의 올곧은 선비로서의 향기가 묻어나는 명승 안에는 야은 길재를 기리는 경모각이 세워져 있다. 길재는 1383년(공민왕 23년)에 국자감에 들어가 생원시에 합격하고, 1388년(우왕 14년) 성균관 박사가 되어 학생들을 가르쳤다. 1389년 문하주서가 되었지만, 고려가 망할 기운을 보이자 사직하고 고향인 선산으로 돌아갔다.

야은 길재는 낙향하여 다시는 벼슬길에 오르지는 않았지만 사람은 키워냈다. 주자의 교육지침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소학의 배움을 중요하게 여기며, 실천을 중시하는 학문 자세를 중요하게 여겼다고 한다. 길재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수제자는 김숙자로 그는 그의 아들 김종직에게 길재의 학문을 잇게 하였다. 김종직의 제자로는 정여창, 김굉필, 김일손과 같은 사림 세력의 핵심으로 자리 잡게 된다.

해평 길 씨 문중 사람들 사이에 야사(野史)로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방원은 길재에게 조선 왕조의 벼슬을 내렸으나 그가 받지 않음을 괘씸히 여기다가 임금이 되고 나서 낙향한 길재에게 사람을 보낸다. 고려 왕조에 대한 그의 충절을 떠보려고 관리를 보내 그의 목을 베어오라고 지시한 것이다. 길재가 순순히 목을 내밀면 귀 한쪽만 자르고 목을 움츠리면 목을 베라는 것이었다. 길재는 충절을 지켰기에 후학을 길러낼 수 있었다고 한다.

금오산은 바위산으로 길재는 자연동굴에서 명상하거나 학문을 닦았다고 한다. 홀로 공부하고자 했으나 단순히 글공부하려는 사람들부터 경전을 토론하고 성리학 강해를 들으려는 학자들이 끊임없었다고 한다. 길재는 양반과 평민, 나이를 가리지 않고 가르쳤다고 한다. 목은 이색의 후손인 이자(1480~1533)는 음성군에 유배되었을 때 거처하던 근처에 초은정이라는 정자를 지어 '포은, 목은, 야은 등을 초대한다'는 의미를 새기기도 했으며 영조 15년(1739년)에 충절공의 시호를 제수했으며 정조는 길재의 뛰어난 학문과 문장을 높이 사 1799년에 문절공의 시호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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