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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Oct 05. 2019

우암 송시열

괴산 청천면 송우암 신도비

대전에서 가장 큰 유적지중 하나로 조선 후기 대유학자인 우암 송시열(1607~1689) 선생이 학문을 닦던 곳으로 1991년부터 1997년까지 1만 6천여 평에 장판각, 유물관, 서원 등의 건물을 재현해 1998년 4월 17일 사적공원으로 새롭게 탄생한 우암사적공원이 있다. 광산김씨이며 소론의 영수였던 명재 윤증과 대척점에 있었으며 긍정과 부정의 평가가 있지만 충청도와 대전지역을 대표했던 대유학자 중 한 명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충청남도, 충청북도, 대전에도 그 흔적을 남기고 있는 우암 송시열의 신도비와 묘소는 괴산 청천면에 자리하고 있다. 우암 송시열이 잠들어 있는 청천면은 괴산군 전체 면적의 약 25%를 차지하고 있는 큰 면이다. 화양구곡은 우암 송시열이 그 경치에 반했다는 절경들이 즐비하며 그를 기린 화양서원도 있다. 배움이란 도달할 수 없는 것 같이 하고 배운 것을 잃어버릴까 두려운 마음으로 해야 한다고 하였다. 배우기를 멈추는 것은 그 수준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후퇴하고 있는 것이다. 

우암 송시열의 묘소에 자리한 신도비를 찾아서 안쪽으로 들어가 본다. 우암 송시열 신도비가 자리한 곳의 바로 옆에는 괴산 청천리 고가가 자리하고 있다.  본성은 서로 비슷하지만 익히는 것에 의해 서로 멀어지는 것은 분명한 것이라 하였다. 아무리 피를 ㄴ나눈 형제라 하더라도 어디를 바라보고 무엇을 익히는가에 따라 서로 멀어지게 된다.  

그의 신도비가 괴산 청천면에 세워져 있다.  대유학자로 기사환국으로 노론이 실각하면서 송시열의 이 같은 정치 운영론은 일단 실패했으나, 18세기 후반 이후 노론의 일당 전제정치 확립 이후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체계로서 정치와 학문 양 측면에서 거의 독점적인 지위를 구축했던 사람이다. 

정치인이며 유학자이었던 송시열은 백성을 위한 방책들도 내놓았다. 우암 송시열이 제기한 구체적 방책들은 농민의 각종 세의 부담을 줄이는 대신, 세를 부담하는 양민층을 확대하고 국가의 재용(財用)을 절감함으로써 국가재정을 튼튼히 하고자 하는 것도 포함이 되어 있었다. 

신도비 옆에 남아 있는 괴산 청천리 고가는  안채와 사랑채, 곳간채, 사당채 등이 남아 있는데 안채 앞에는 一자 형태로 곳간채가 길게 세워져 있다. 3칸 크기의 대문채를 지나 안으로 들어서면 사랑채가 자리하고 있다.   이 고택은 우암 송시열의 후손들이 살던 집라고 한다. 송시열의 8대손인 송병일이 충청감사로 재직 시에 아버지를 위해 별당을 지어준 것이 증축을 거쳐 종택으로 까지 사용되었다. 우암 송시열의 종손들이 6대에 걸쳐 이곳에 살았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싹은 틔우나 꽃을 피우지 못하는 사람이 있고, 꽃은 피우나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이는 싹은 틔웠으나 꽃을 피우지 못한 사람은 싹을 틔운 후 배우기를 멈추었기 때문이다. 꽃을 피웠으나 열매를 맺지 못한 것은 화사한 꽃에 취해 다음 단계를 가는 배우기를 멈추었기 때문이다." - 공자


우암은 장기 유배 생활 중에서도 학문을 계속하였다. 찾아오는 전국의 문인들에게 강학하였으며, 때로는 지역민을 모아 가르쳤으며 비록 사약을 받고 죽었음에도 유교의 대가들만이 오른다는 문묘(文廟)에 배향되었고, 전국 23개 서원에 제향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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