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전쟁은 자본에서 결정된다.
우리 독립운동의 역사에서 가장 부족한 것은 바로 돈이었다. 군자금 마련은 독립운동에서 큰 향방을 갈랐다. 이것은 단순히 독립의지가 있는 국민들의 수가 많고 적느냐의 차이가 아니었다. 자본이 열악한 상황에서 독립군은 많은 활동을 했지만 한계가 분명히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친일부역자들이 일본을 위해 일한 이유 역시도 돈이었다. 이승만이 미국에서 독립운동과 관련 활동에 관심을 보인 가장 큰 이유는 독립운동 자금 때문이기도 했다. 기록에 의하면 이승만은 독립운동 자금을 자기 돈이라 주장하며 당시 재미 한인단체 국민회와 재판을 한 사실도 있었다. 1917년 국민회는 미국에서 열린 ‘소약국 동맹회(국권 회복을 위한 약소국 연합)에 대표를 파견하려 성금을 모았는데, 문제는 쓰고 남은 1100달러의 소유권을 두고 맞섰던 것이다. 국민회는 남은 돈에 대한 회계감사를 요구했지만 이승만은 거부했다.
일제강점기에 국제정세를 보면 1차 세계대전은 정부의 성장과 전통적인 사회 구조의 소멸을 촉진시켰으며 전쟁 전에는 국가 수입의 4%를 지출하던 국방 예산이 제1차 세계대전 때는 25퍼센트에 이르렀다. 모든 참전국들의 시민은 자유를 제약받았다. 일본이라의 국민성 역시 그런 환경에 적합하게 살아왔기에 중일전쟁, 러일전쟁, 만주사변 등으로 이어지는 군국주의에 쉽게 물들어갔다. 일본은 오히려 한반도의 국민들이 특이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나라의 지배층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나라를 넘겼건만 저항하는 국민들이 계속 생겨났던 것이다.
일본의 한반도 지배정책은 여러 단계로 이루어졌다. 모든 친일부역자들이 동일한 대접을 받지는 못했다. 그들이 생각했을 때 지배층이나 지역유지에게는 어느 정도 이권을 보장했지만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생각 외로 많은 것이 보장되지 못했다. 한정적인 독립자본으로 독립군의 활동은 제약적일 수밖에 없었다. 전쟁은 돈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봉오동은 두만강에서 40리 거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고려령의 험준한 산줄기가 사방을 병풍처럼 둘러쳐진 장장 수십 리를 뻗은 계곡 지대였다. 봉오동전투를 이끌었던 홍범도는 당시 일본군 제19사단장은 보병 소좌 야스카와(安川二郎)가 지휘하는 보병 및 기관 총대 1개 대대를 출동시킨 것에 대비하여 전략상 유리한 위치를 점하고 유인작전을 한다.
독립군의 봉오동전투, 청산리전투 같은 승리는 계속 이어지지 못했다. 산발적으로 일본인에 대한 공격이 있었지만 대규모 전투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모든 전투에는 필연적으로 군자금이 필요하고 군자금을 모으려면 구심점이 필요한데 당시 적지 않은 조선인들이 독립운동 자금을 마음대로 유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대통령도 그중에 하나였다. 그런데 궁금한 것이 있다. 자신이 대표로 나섰지만 민족과 나라를 위해 쓰겠다고 해서 한 푼, 두 푼 모은돈은 자신을 보고 모아준 것일까? 그렇다면 유명인이 큰 사고로 인해 발생한 유족을 도운다고 성금모금 활동을 한 다음 자신이 마음대로 써도 되는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