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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Oct 10. 2019

갑신정변 (甲申政變)

준비되지 않은 시기에 일어서다. 

명치유신 혹은 메이지유신으로 불리는 일본을 개혁으로 이끄는 데 성공한 흐름은 오랜 시간에 걸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오랜 시간 전이지만 당시 일본과 조선의 상황은 닮아 있었다. 시기상의 차이가 있었을 뿐이다. 텅 빈 국고와 낙후된 국방 체제만을 떠안고 있던 막부 정권은 외국과의 접촉을 회피하는데만 골몰했다. 유학의 유자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조선의 세도가들 역시 외국과의 접촉을 회피하고 기득권을 유지하는 데에만 골몰했다. 그렇지만 일본은 천황을 중심으로 변화를 도모하여 개혁에 성공한다. 당시 사카모토 료마와 나카오카 신타로를 비롯한 유신 지도자들은 1825년에서 1850년대에 태어났다. 


논산에 가면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는 갑신정변의 주역 중에 한 명인 서재필 박사의 생가터가 남아 있다. 갑신정변의 주역들은 1850년대에서 1860년대에 태어났다. 시기상으로 한 세대쯤 뒤에 이들 역시 조선을 개혁하기 위해 움직였다. 오랜 시간 움직이며 메이지 유신의 주역이 만들어낸 삿초 동맹은 에도 막부 권력의 쇠퇴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고 막부 타도에 공헌하게 된다. 


갑신정변(甲申政變)은 김옥균(金玉均, 33세), 박영교(朴泳敎, 35세)와 박영효(朴泳孝, 23세) 형제, 서광범(徐光範, 25세), 홍영식(洪英植, 29세), 서재필(徐載弼, 20세) 등 급진 개화파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일본 메이지 유신의 방식으로 급진적 개혁을 추진해야 한다는 급진 개화파는 기술과 제도의 도입에 그칠 것이 아니라, 정치·사회를 근본적으로 개혁해야 한다는 변법론(變法論)을 주장했다.  문제는 시간과 정치력이 바탕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세력이 부족했던 갑신정변의 주역들은 일본의 속내도 모른 채 그들을 동원했으며 구심점이 되었어야 할 고종을 설득하지 못했다. 홍영식과 박영교는 고종을 호위하다 청나라 군대에게 살해됐다. 갑신정변의 삼일천하는 이렇게 마무리된다.  


서재필 박사는 이후 일제강점기에 독립신문의 창간과 독립 협회의 창립에 참여했다. 근대화와 자주독립에 많은 영향을 미쳤으며 만년에는 미국에 가서 생을 마쳤다.  갑신정변으로 인해 불씨가 댕겨진 일본의 야욕은 10년 뒤인 1894년 청일 전쟁에서 승리하며 한반도에 대한 장악력을 갖추면서 러일전쟁 승리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일본은 그 이후 제국주의의 대열에 끼며 지금도 그 시기의 영광을 재현하려고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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