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는 누군가 Oct 21. 2019

군대 이야기

통영 해병대 통영 상륙작전 기념관

개인적으로 물어본다면 군대 이야기는 잘하지는 않는 편이다. 군대생활이 편했던 것도 아니고 딱히 자랑스럽지도 않다. 그런데 왜 의무로 그 고생을 해야 하는지는 아직도 의문이긴 하다. 군대생활 아니더라도 충분히 고생하면서 살았는데 말이다. 전략적으로 따져보아도 의무 징집으로 그 정도의 군인 수를 유지해야 할 이유는 전혀 없다. 만약 한국전쟁 이전이라면 유효하지만 그 이후로는 의미가 없다. 국가체계를 유지하고 국가수호라는 미명 아래 시스템을 유지하려는 목적 외에 별 효용성은 없어 보인다. 

통영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통영을 대표하는 자유수호의 공원이 자리하고 있다. 해병대 통영 상륙작전 기념관, 삼일운동 기념비를 비롯하여 월남참전기념탑까지 모두 자리한 조국수호의 첨병을 모두 한 곳으로 모아놓은 듯한 느낌이 드는 곳이다.  

삼일운동을 기념하는 비를 비롯하여 삼열사의 기념비까지 모두 있는 곳이다. 주로 나이 드신 분들의 발걸음이 이어지는 곳이다. 

한국이 의무병제에서 모병제로 한다고 해서 약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직업으로서 군인을 선택하는 것이 당연한 사회가 되어야 한다. 거대해진 군과 관련된 지원이나 제대군인(직업으로서 선택한)에 대한 지원이나 후원이 너무나 방대한 것도 문제가 있어 보인다.  

해병대가 준 특수부대로서 자리매김한 첫 성공적인 작전은 통영에서 이루어졌다. 인천 상륙작전이 9월에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기 전에 낙동강 전선을 기점으로 최후의 방어전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고착상태에 있던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북한군은 통영을 통해 역으로 마산, 진해,  부산을 협공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통영이 점령되면 거제와 부산으로 진입하는 모든 길을 봉쇄하는 효과를 볼 수 있었다. 

해병대로서는 통영을 상륙하여 작전을 펼치고 성공적으로 북한군을 격퇴한 사건은 해병대의 입지를 확실히 굳힐 수 있는 작전이기도 했다.  

통영에 자리한  해병대 통영 상륙작전 기념관은 그 작전과 그 작전을 이끈 김성은 부대의 기록이 남아 있다.  한여름인 1950년 8월 16일  고성으로부터 통영으로 향한 북한군 제7사단 제51연대와 제104치안연대의 650명이 1950년 8월 17일 새벽 1시통영시내로 침공해온다.  

당시 거제도에는 대규모의 포로수용소가 있지는 않았다. 거제도에 대규모의 포로수용소가 자리하게 된 것은 인천 상륙작전으로 허가 찔린 북한군이 포위되면서 대규모 포로가 발생해서 계획을 세우고 수용하게 된 것이다. 

낙동강 전선을 방어해야 하는 상황에서 전선을 유지해야 했었다. 당시 통영 근해를 경비하던 해군 함정 703·901·504·512·302·307 호정 및 평택호 등의 지원 엄호 하에 8월 17일 18시 통영반도 동북방에 있는 장평리에 상륙을 개시하게 된다.  

당시 사용했던 무기들과 지휘체계와 전략 등이 기념관에 남아 있다.   통영 상륙작전은 우리 해군·해병들이 최초로 성공시킨 단독 적전 상륙작전이었을 뿐만 아니라 유엔군을 방어하기 위한 철수작전 중 유일한 공격작전으로  적의 유일한 공격로이며 통영 공격의 전술상 요지인 원문고개에 강력한 방어진을 구축하게 된다.  

사람들은 보통 자신이 모르는 이야기나 관심이 없는 이야기를 좋아하지는 않는다. 특히 갈 일도 없고 관심도 없는 분야라면 더욱더 그러할 듯하다. 남자들이 군대 이야기를 하는 것은 대가를 받지 않고 젊은 시절을 그곳에서 보낸 것에 대한 보상심리다. 딱히 자랑스럽지는 않은데 자랑스럽게 보여야 그 시절 그 시간이 아까워질 것 같지 않은 바람일 듯하다. 그렇지만 군대는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어떤 형태로든 존재하며 국민과 국토를 방어하기 위해 필요한 조직이란 건 사실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시간의 저축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