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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Oct 28. 2019

연산의 김집

연산향교에서 후학을 기르다.

더 많은 정보와 학문이 넘쳐나지만 오히려 옛날보다 공부를 하는 사람이 많지가 않다. 공부의 목적을 남들과 다른 신분의 차이를 만들려고 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 느낌이 든다. 공부라는 것은 자신과 스스로 하는 싸움의 길이다. 물론 상대평가가 필요할 때도 있지만 공부의 끝에는 자기 자신의 발견이 최선이어야 할 것이다.  계룡에 유명한 고택이 있는 사계 김장생을 아버지로 둔 김집은 선조 때 진사로 합격한 김집(金集, 1574년 음력 6월 6일 ~ 1656년 음력 윤 5월 13일)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유학자이며 작가이다.

아버지가 스승으로 평생을 모시고 살만큼 훌륭한 사람 역시 큰 복을 타고 태어난 것이다. 김집의 아버지는 사계 김장생으로 둘째 아들인 김집에게 평생에 가르침을 했던 인물이다.   인조반정 직후 공신들의 월권행위와 권력남용, 탐욕스러움을 거론하다가 그는 반정공신들로부터 미움을 받게 된다.  


"문원공 노선생(사계 김장생)이 일찍이 말하길, 이 아이(김집)가 5~6세에 이미 친구를 따라 놀거나 희롱하는 일이 없었고 손님이 오고 가면 능히 읍양(揖讓)하고 승강(乘降) 할 줄 안다고 했다."

이곳 연산향교는 김집이 아버지인 김장생을 모시고 낙향한 다음 후학을 길러내던 공간이라고 한다. 종이가 귀하던 시대에 서책은 향교 같은 곳에 보관되며 도서관 역할도 했다. 최초의 인류 복희가 태평성대를 이루고 있을 때, 황하에서 용마가 나타났다고 하다. 용마의 등에는 54개의 점이 그려져 있었는데 이 점은 홀수와 짝수로 짝을 지어 음양의 조화를 나타냈는데 이것이 황하에서 얻은 그림 하도라고 한다. 

연산향교의 대성전과 동무, 서무에는 유교문화의 핵심인물인 공자와 4명의 제자들, 제자들의 부모, 그리고 중국 현인들과 우리나라 18명 현인(설총·최치원 등)의 위패를 모시지만 서원은 대부분 크게 출세한 문인을 모시는 경우가 많이 있다. 

찾아간 날 오전에 행사가 있었지만 필자가 갔을 때는 마침 행사가 끝나고 사람들이 나오고 있었다. 앞서 말한 하도에서 복희는 하도의 무늬를 가지고 팔괘를 만들었는데 이가 낙서다. 귀하디 귀한 하도와 낙서를 잘 보관해야 했는데 이것을 보관하는 장소를 하도의 '도'와 낙서의 '서'를 합쳐서 도서관이라고 불렀다. 지금의 도서관은 이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화사하게 피어났던 배롱나무꽃은 지고 이제 가을을 맞이해서 단풍과 함께 잎을 떨구어 내고 있었다. 김집은 다양한 글을 쓴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시도 제법 썼다고 하는데 그가 쓴 시중에 봄날 새벽이라는 시가 있다. 


虛室人初覺 / 빈 방에서 잠을 깨니

春天夜已란 / 봄날 밤이 이미 무르익었고

孤雲依水宿 /외로운 구름은 물 위에서 자고

殘月映松閒 / 새벽달은 소나무 사이에 빛난다.


心靜都忘世 / 세상 일 잊으니 마음 고요하고

夢恬不出山 / 산을 나가지 않아 꿈도 편안한데

緬思故園竹 / 고향 정원에 있는 대나무는

長得幾何竿 / 줄기가 지금 얼마나 자랐을까.

같은 사람에게 배웠지만 김집에게서 당파가 갈라지기 시작한다. 그의 제자 중에 대전 기반의 우암 송시열과 논산 기반의 윤증이 있는데 서로 노론과 소론을 이끌게 된다.  일을 처리할 때는 의리로써 판단하고 과감하게 처리하는 추진 능력을 겸비하고 있었던 김집은 강하면서 부드럽고 부드럽더라도 때론 강했던 사람이다.  

이곳이 대부분의 행사를 주체하고 각종 의복을 보관하는 장소라고 한다.  김집은 병자호란의 격변기에 살았다. 병자호란은 인조에게 자존심에 큰 상처를 주었고 아들인 소현세자와 반목하게 만들었다. 결국 소현세자와 강빈은 비극적으로 죽음을 맞이하는데 김집은 소현세자, 민회빈 강 씨의 복권 여론을 주도하였다. 그 뒤 김홍욱이 민회빈 강 씨의 복권과 경안군 석방을 요구하다가 장살 당하자 관작을 사퇴하였다.

연산항교는 창건 이후 지방 교육의 활성화와 인재 양성, 성인의 제향이라는 기능을 담당하였으며 사계 김장생과 신독재 김집을 이곳에 배향하고 있다.  할아버지 황강 김계휘는 김집을 기특하게 여겨 항상 우리 집을 이을 사람은 반드시 이 아이라고 자주 말했다고 한다.  평생을 학문과 함께 살았던 김집은  1656년(효종 7년) 윤 5월 13일에 지병인 한열증(寒熱症)으로 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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