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2. 그 여자의 기억
사람의 기억은 자기중심적으로 작동을 할 때가 많다. 증오라는 주제로 작품을 만든 적이 있다. 세상의 반은 남자고 세상의 반은 여자인데 어떤 이들은 서로를 증오하며 SNS 등에서 공격을 일삼는다. 대부분의 주장은 의미 없거나 과장된 것들이 많았다. 증오에 대해 심리학자와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성인이 되어서도 자신의 감정을 컨트롤할 수 없는 사람들은 위협을 당했을 때 그것을 증오로 바꾸는데 그 과정에서 스스로가 컨트롤되지 않는 것이라고 그는 말한 적이 있다.
선희는 가을의 낙엽이 셀 수 없이 떨어진 도로를 바라보며 오래간만에 만난 친구 지연이와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때론 카페라테가 좋기도 하고 어떤 때는 카페모카가 당길 때가 있는데 이날은 카페모카를 마시고 싶은 날이었다. 수저로 다시 한번 저은 다음 머그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가서 한 모금 마셨다. 그런 선희를 보며 지연이가 말을 걸었다.
"선희야, 요즘도 그 전 남자 친구에게 연락 오니?"
선희는 불편한 질문이었는지 말하고 싶지 않은 표정이었지만 입을 떼었다.
"이사를 간 것도 있지만 연락을 안 받으니까 이제는 뜸한 것 같아."
"그래 그랬구나. 그 사람도 처음에는 괜찮아 보였는데 피해의식이 많았던 것 같아."
"나도 그 사람을 보고서야 알았어. 어떤 사람은 불평등과 불공정하다고 느끼는 것을 쌓아놓고 폭발시키기도 하는구나라고 말이야."
"그런 사람들 SNS에서 많이 있잖아."
"나 역시 그렇지만 때론 불평등하다고 느낄 때도 있지만 그걸 쌓아두면 내가 힘들어지거든.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그걸 쌓아두고 폭발할 때 모두 동원하더라고. 그 사람이 그런 성향이 보이길래 이건 아니다 싶었어."
"일은 다른 것을 하고 있지만 내가 심리학을 전공했잖아. 최근의 남혐 여혐 문제를 보면 결국 전통적인 산업구조의 붕괴가 기회의 박탈로 이어지고 그걸 해소 못하는 남녀의 심리적인 것에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칼럼을 본 기억이 나네."
"그런 이야기 그만하자. 참 너는 결혼생활은 어때? 여전히 남편과 딩크족으로 살기로 한 거 유지하고 있는 거야?"
"응 변함은 없어. 출산율이니 어쩌니 하면서 지원이 많아지고 있다고 하지만 결국 문제는 애를 키우는데 일부 경제적인 것을 지원해준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잖아. 아이를 키우는데 지원을 해줬다고 쳐봐. 이후 우리의 삶은 누가 책임져줄 건데 육아, 사교육, 대학, 취업 때까지 자식을 키우고 나면 그 이후에는 어떻게 살지 고민해주지는 않잖아."
"맞아. 나도 결혼은 안 했지만 너와 비슷할 것 같아. 재취업의 문제도 있기는 하지만 직장생활에서 어쩔 수 없이 밀려나간 후에는 설자리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뭐가 정답인지는 모르지만 점점 사람들이 어디론가 휩쓸려가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요즘은 감을 잡을 수가 없네. 작은 언론사에서 일하고 있지만 가짜 뉴스와 선전이 난무할 때 보면 자괴감이 들기도 해."
지연이가 말했던 남자와 헤어진 것은 벌써 1년이 훌쩍 지난 일이다. 처음에 보았을 때는 매너가 좋고 나름 통 크게 돈을 쓰면서 환심을 살려는 것이 보였지만 그냥 넘어가 주었다. 남자들은 대부분 어느 정도의 허세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대화를 하다 보면 그가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이나 이성에 대한 편견과 증오가 생각보다 크다는 것 보게 되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이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림에는 관심이 전혀 없었으며 스킨십에 더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남자답고 통 큰 것처럼 보였지만 자신의 생각을 상대방에게 억지로 주입시키고 돈을 버는 데에만 최우선시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와는 제대로 된 소통이라는 것이 없었던 것만 남아 있다. 감정을 표현하고 지금 상황을 설명하려고 하더라도 아무것도 듣지 않으려고 작정한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항상 입에 달고 사는 말이 있었다. 한국사람은 98%쯤은 모두 돈으로 설명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선희는 지연이와 함께 커피숍을 나와서 걷기 시작했다. 11월이 되면 중앙에 자리한 공원의 가로수길은 낙엽을 치우지 않고 낙엽 밟는 소리를 느끼게 해 주었다. 비가 오지 않은 날이면 수분이 날아간 낙엽에서 들려오는 바스락 거림이 그대로 귓가에 들려왔다. 지연이와 선희는 서로의 모습을 인증숏으로 찍어주기도 하고 둘만의 추억을 남기려고 빨갛게 익은 단풍나무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기도 했다. 지연이는 갑자기 떨어져 있는 낙엽을 두 손 가득히 들고 하늘에다가 뿌려댔다. 그리고 그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아마도 어디선가 본 듯한 영화 속 장면이 갑자기 생각난 것처럼 보였다.
아마 선희의 기억은 그럴지 몰라도 그 남자의 기억은 다를지도 모른다. 사람마다의 입장 차이가 있으니 그럴 수가 있다. 그렇지만 그 기억을 바꾸어주고 싶지도 않고 이미 지나간 과거의 일이다. 아마 그 남자는 사랑은 서로 마주 보는 것이 아니라 둘이서 한 곳을 바라보는 것이라는 말을 영원히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