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모산성의 사계절
올해 여러 가지 일이 있었지만 어쨌든 간에 무사히 사계절을 모두 경험하며 지나갔다는 것에 감사한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자리에 많이 참석하게 되는데 모두들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시간이 너무 빠르다'라는 말이다. 한 것도 없는데 시간만 지나갔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많다. 개인적으로는 벅찰 정도로 무언가를 많이 채우고 써 내려간 것을 안다. 물론 흔적으로도 남아 있다. 그래서 잘 보냈다는 생각이 든다. 게다가 아직도 10일이나 가지 않고 기다리고 있다.
고모산성의 봄
아직도 봄이 되려면 시간이 남아 있지만 봄이 되기 전에 지금에 충실해보려고 한다. 문경을 처음 가기 시작했을 때 고모산성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모두 담아보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발길이 닿는 대로 가다 보니 2년 만에 문경 고모산성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모두 만나볼 수 있었다.
우리는 모든 사람 안에 신적인 무언가가 있다고 믿는다. 사람이 사는 세상에는 선악이 존재한다. 아담과 이브는 이 죄로 인해 에덴에서 추방되었지만 뒤돌아보지 않고 인생을 살았다. 아담과 이브에게는 보이지 않는 신의 이야기보다 눈앞에 보이는 사과가 훨씬 더 중요했다.
다음번에 문경 고모산성에 오면 산의 주변을 종주하면서 속살을 만나보아야겠다. 점성술은 어떻게 보면 그냥 미신이라는 생각도 했었는데 최근에는 우리 몸을 구성하는 물속의 원자가 우주의 어디선가에서 왔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태어날 때 어느 행성에 어느 별자리에 들어 있는가에 따라 운명의 흐름이 결정될 수도 있겠다란 생각이 든다.
짧은 시간을 뒤로하고 봄이라는 계절은 순식간에 지나가버린다. 한 해가 시작되고 나서 이 맘 때가 되면 연초에 결심한 계획을 다시 수정하는 사람이 생겨난다. 이때 포기하고 되는대로 살던가 그 원대한(?) 계획을 수정하는 사람도 있다.
고모산성의 여름
2020년 여름의 모습이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올해의 여름에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잘 알고 있다. 큰 사고가 있었고 그로 인해 많은 것이 바뀌게 되었다. 그런 일이 있었어도 고모산성은 여전히 똑같은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고모산성의 위에 올라와서 보면 진남교반으로 휘어 감아 흐르는 강이 내려다보인다. 탈레스는 움직일 수 있기 때문에 변화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외의 모든 것으로 형성될 수 있는 어떤 물질이 근본이며 생명의 본질이라고 보았다. 그는 모든 생명체들이 살아가는 데 반드시 필요한 것은 바로 물이며, 물은 이동하고 변화할 수 있기 때문에 만물의 근원은 물이라고 보았다.
문경새재는 산 넘어 산이 계속 보이는 곳이다. 문경을 처음 왔을 때 주변을 돌아보았을 때 어디든 산이 있는 것을 보면서 어딘가에 안겨 있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다.
고모산성의 위쪽에 올라와서 둘러보고 내려오면 원래 이곳에 있었을 옛 집들이 복원되어 있다. 토끼비리를 돌아서 이곳에 와서 묵으면서 다시 한양으로 발길을 했던 선비들이 수없이 묵었을 것이다.
고모산성의 가을
많은 사람들이 가을쯤 되면 이제 한 해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아쉬워하면서 싱숭생숭해진다. 한 해를 잘 살았는지 생각해보며 돌아보기도 한다.
"경험이 전체 인생 속에 존재하므로, 전체 인생 역시 경험 속에 존재한다." - 한스게로르크 가다머
가을 단풍은 아름답기도 하지만 경관에 대한 무언가의 기대감을 가지게 한다. 인간은 우선 존재하게 세상에 등장한 후에야 자신을 정의한다고 하는데 가을의 경관도 자연이 아닌 인간이 정의하기에 가치가 부여된다.
가을에 영남대로에서 가장 험로인 이 길은 수 천 년 동안 끊임없이 이어진 사람들의 발길로 깊은 발자국 형태의 길이 되어 고모산성의 경계를 산성과 이어진 토끼비리라는 천혜의 암반 길까지 이어진다.
고모산성의 겨울
고모산성의 겨울은 봄, 여름, 가을과 다른 모습처럼 보이지만 추억이 남아 있다. 지세가 험하여 피난성(避難城)으로는 매우 적합했을 것으로 보이는데 고모산성은 성 안의 지세가 평탄한 곳이 없어 장기간 입보항쟁(入堡抗爭)할 수 있는 곳은 아니라고 한다.
지나고 보니 모든 것이 선명하게 보이는 것처럼 보여도 복수로 존재하는 기억은 결코 어려운 이야기가 아니다. 과거의 기억은 선명하게 윤곽이 그려지지 않는데 단지 기억력이 떨어져서 생긴 결과가 아니다. 현존하지 않는 과거가 기억을 중첩시켜 드러내기 때문에 과거 사건의 가장자리에는 기억의 잔상들이 남아 있게 된다.
사람들은 여행지에서 기억에 기반한 추억을 남기게 된다. 필자에게 고모산성의 봄은 첫인상의 푸근함이었고 여름은 물의 에너지가 넘치는 그런 공간이었으며 가을은 다채로운 환상, 겨울은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2020년은 고모산성의 다른 면을 찾아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