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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Dec 27. 2015

데빌스 노트

진실보다 중요한 사람들의 편견

이 영화는 실화다. 

                     

1993년 5월 미국 아칸소 주 웨스트 멤피스에서 실종된 8살짜리 소년 3명은 다시 집으로 돌아오지 못한다.
그들은 얼마 후, ‘악마의 소굴’이라 불리는 로빈 후드 숲 근처 강가에서 참혹한 상태의 시신으로 발견되고, 경찰과 정부 당국은 평소 아이들과 안면이 있던 10대 청소년 세 명이 범인으로 지목한다. 이들이 평소 주술에 관심이 많았으며 조울증 병력이 있는 괴짜라는 사실만으로 순식간에 아이들을 제물로 바친 악마 숭배자라는 여론이 형성된다.


다각도로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별 의미가 없는 세상에서 이들 사건은 별로 새삼스럽지도 않다. 그렇지만 절대강자를 제외하고 누구라도 희생자가 될 수 있는 상황은 위험하다. 특히나 신이 그것을 바라셨다라고 하는 생각만큼이나 이 사회를 망치는 것은 드물다. 그들은 그들의 사적인 이득을 위해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당장 지하철역이나 버스정류장 주변을 가보아도 그런 사람들은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주변에 어려운 사람들은 돕는데 인색한 사람들이 전혀 안면도 없는 행인들을 천국으로 인도하기 위해 안달이다. 레드 채플린의 stairway to heaven의 마니아인가. 


법은 중심에 있지 않다. 


1990년대 초반에 미국은 사법제도가 잘 갖추어진 선진국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수의 약자들에게는 한없이 강한 것이 법이었다. 대변할 사람이 없는 서민과 소수의 약자들에게 가혹한 법의 잣대를 들이대고 경찰들은 자신들의 실적과 지역 거주민을 위해 무엇이든지 꾸밀 수 있었다. 모든 일에 끝은 있어야 하고 그 끝은 조금은 아니 많이 왜곡되었더라도 인정할 만했다. 그것이 사람이 사는 세상이었다. 


나와 다르면 배척하자.


모든 사람이 똑같을 수는 없다. 다른 사람과의 다름을 인정해야 하지만 우리는 다름은 틀림으로 인지한다. 나 조차 그런 선입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과 그걸 나와 다르므로 잘못된 것이라고 규정을 지어버리는 것에는 차이가 있다. 헤비메탈과 주술에 관심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살인의 동기가 되지는 않는다. 개인적인 취향일 뿐이다. 


무얼 위하여 사는가. 


사람들에게는 살아가는 목적이 있다. 보통은 자신의 가족을 위해서 살아간다. 정의나 불의 그런 것은 삶과 거리가 멀다. 그런 것에 신경 쓰다 보면 가족에게 신경 쓰기가 쉽지가 않다. 영화의 주인공은 제 삼자의 입장에서 사건을 객관적으로 바라본다. 아마 관객들은 이것이 참 거슬렸을지도 모른다. 실제 범인을 잡던지 아니면 본격적으로 뛰어들어서 모든 걸 걸던지. 그런 생각을 가졌을 테지만 주인공은 철저히 법의 테두리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한다. 


무얼 위하여 사는가는 사람에게는 정말 중요한 문제이다. 그것에 따라 삶의 방향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분명 한 건 이 사회가 조금은 살기 좋은 그런 세상을 위하여 산다면 그 삶은 가시밭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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