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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Jan 16. 2020

앎과 실천

충현서원에서 떠나는 마음의 기행

한 사람의 인생을 걸어가는 길에 비유하면 독서는 여행할 길의 지도와 안내를 담아놓은 가이드북을 열어보는 것이고 실천은 말을 먹이고 바퀴에 기름칠을 하고 다시 가이드북을 살펴 여행을 실행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먼 길을 걸어가면서도 계획만 세우고 가이드북을 살피지 않고 실천하지 않으면 끝내 성공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세밀하고 정확하게, 익숙해지는 것은 확실하고 참된 것이란 성인이라도 모두 이루지 못한다고 한다. 

1625년 ‘충현(忠賢)’이라 사액되었으며, 그 뒤 김장생(金長生)·송준길(宋浚吉)·송시열(宋時烈)을 추가 배향하여 선현 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온 충현서원은 1581년(선조 14) 서기(徐起)에 의하여 주자(朱子)를 비롯, 이존오(李存吾)·성제원(成悌元)·이목(李穆)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셔진 곳이다.

대전에서 공주로 가는 길목에서 옆으로 살짝 새면 충현서원으로 가는 이정표가 나온다.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사우(祠宇), 중앙의 신문(神門)과 양옆 협문(夾門)으로 된 삼문(三門), 6칸의 재실(齋室), 충현서원 사적비, 충현서원 사실 및 송우암추향비, 하마비(下馬碑) 등이 남아 있다.

옛날을 그린 드라마를 보면 고려말의 혼돈이 얼마나 심했는지 예상해볼 수 있다. 특히 공민왕 때 신돈의 횡포는 극에 달했다. 공민왕의 신임으로 온갖 악행을 저지르던  신돈(辛旽)의 횡포를 탄핵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샀으나, 이색(李穡) 등의 옹호로 극형을 면하고 장사감무(長沙監務)로 좌천된 사람이 이존오다.  그후 공주 석탄(石灘)에서 은둔생활을 하며 울분 속에 지내다가 죽었다. 

역사에서 보면 능력이 출중하고 똑똑하다고 하여 자신에게 맞는 자리에 올라가지 못한 사람이 셀 수 없음을 볼 수 있다.  신돈의 당여들이 반드시 그를 죽이려고 하였을 때 당시 이존오의 나이는 25살이었다. 그는 고향으로 낙향하여 공주 석탄(石灘)에서 은둔생활을 하다가 공민왕 20년(1371년)에 세상을 떠났다. 울분을 못 이겨 세상을 떠난 나이가 향년 31세였다. 

이존오가 죽고 3개월 뒤에 신돈은 수원에서 처형되었으며 공민왕은 이존오를 성균 대사성(成均大司成)으로 추증하였다.  젊지만 기개 있는 그를 두고 공민왕은  "나는 이존오의 성난 눈이 두렵다."라고 하였다고 한다.


구룸이 無心탄 말이 아마도 虛浪하다

中天에 떠 이셔 임의(任意)로 단니면서

구타야 光明한 날빗츨 따라가며 덥나니


- 청구영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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