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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Jan 18. 2020

40년의 시간

압축성장으로 급격하게 변한 한국

한강의 기적이라고 불리면서 한국은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루었다.  그렇지만 거의 대부분이 긍정적으로 평가되던 시기는 1997년 IMF가 오기 직전까지 만이었다.  압축성장의 어두운 이면을 우리는 보지 못했었다. 얼마나 많은 빈부의 격차를 만들고 어느 나라보다 급격한 노령화 사회를 맞게 될지 말이다. 중국과 미국이 1단계 무역합의를 이루었으나 그 과정이 순탄치 않았다. 그 이유는 중국이 미국에서 수입할만한 물건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전 세계가 하나로 이어지면서 인건비에 의해 국가의 수출경쟁력이 결정되었다. 

음성의 원남면은 음성에서도 가장 낙후된 곳이기도 하다. 원남면은 최근 몇 년 동안 주민들의 주도적 참여로 농촌중심지 활성화를 꾀하고 있다. 이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7080 추억을 회상하며 거리를 만들어두었는데 이름하여 보내 장터길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곳으로 들어가면 40년 전의 과거로 회상하며 걸어볼 수 있다.  

40년 전에 한국은 인건비로는 전 세계에 수출경쟁력을 가지고 있는 확실한 경제 신흥국이었다. 생활수준이 나아지고 소득 수준이 급격하게 높아지기 시작했다. 급격하게 높아진 소득은 아이러니하게도 국민들이 먹고사는 데는 큰 도움이 되었지만 장기적으로는 수출경쟁력을 낮추게 된다.  시간이 지나 2000년대 들어 생활필수품 등은 중국으로 넘어가게 된다. 

소변금지라는 문구가 어디서나 볼 수 있었던 때가 있다. 아무렇지 않게 해수욕장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웃통을 벗고 돌아다니던 시절도 한국에 있었다. 과거를 회상하면 좋았던 것도 있지만 품위로만 본다면 아닌 행동을 하는 사람도 많았다.  

가장 생각나는 문구는 "딸 아들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이지 않을까. 1980년에 이런 문구는 일반적으로 만나볼 수 있었다. 불과 40년이 지나 지금은 출산율이 한 명이 안된다. 1981년 1,000불 국민소득의 길을 바라면서 살았지만 이제는 30,000불 시대에 살고 있는데 왜 출산율은 높아지지 않는 것일까. 

한국의 자동차산업도 참 많은 발전을 이루었다. 우리 힘으로 만든 한국차라는 포니가 나오면서 큰 환호를 받기도 했었다. 작은 마을에는 원래 보 천장이라는 재래시장이 서기도 했었는데 송병표라는 사람이 시장이 들어설 것이라고 소문냈지만 사람들이 모여들지 않자 행상들에게 술대접을 하고 주막 지붕에 올라 엽전을 뿌리고 술과 돈을 공짜로 얻을 수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보천장이 형성되기 시작했지만 1960년대에 음성읍의 5일장에 흡수된다.  

농촌지역으로 음성군 9개 읍면 중에 유일하게 공동주택이 없는 지역이 원남면으로 이 마을의 건너편에는 보천 역이 있다. 지금은 폐역으로 1928년 12월 25일에 보통 역으로 영업을 시작했지만 이용객 수가 지속적으로 감소해 2006년 1월 1일부터는 승차권 발매 업무가 중단됐고 2007년 6월 1일부터 모든 여객열차가 정차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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