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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Feb 02. 2020

진해의 중심

진동리 유적지의 청동기 흔적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이 만든 지명, 도시는 지금도 많은 곳에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일본식으로 만들어진 건물은 많이 사라지기도 했지만 역사의 한 부분으로 인식하고 보존되는 곳도 있다. 창원시의 한 도시이기도 한 진해는 일본이 만든 지명이기도 하다. 바다를 진압한다는 의미의 진해는 일본이 해상 방어의 거점으로 구축한 신도시였다. 봄이면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진해의 중심을 찾아가 보면 지금의 진동면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창원 진동리 유적은 관아가 있던 자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2002년 토지구획 정리사업 과정에서 발견된 삼국시대 이전의 청동기 유적으로 논밭이었던 유적지를 지금처럼 정비한 것은 2014년이었다.

전국에 고인돌이 있는 곳을 많이 가보았지만 그 규모면에서만 본다면 창원 진동리 유적은 상당히 큰 편이다. 지구 상의 그 어떤 규제도 인간 본성을 통제할 만큼의 힘은 없다고 한다. 이는 역사를 읽지 않는 사람들이 계속 존재하는 한 그럴 것이라고 한다. 

지적으로나 기술적으로나 인간은 많은 진보를 해왔으니 그 과정에서 비이성적인 감정적 자아를 잘 길들였을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선사시대 사람들과 지금의 감정은 그렇게 달라지지 않았을 수 있다. 

동쪽 입구의 거대한 타원형 무덤이 가장 상징적인 진동리 유적에는  대형 고인돌과 석관묘 41기가 군집을 이루고 있으며 직경 20m에 달하는 돌무지가 언뜻 설치미술처럼 보이지만 선사인들의 흔적이기도 하다. 

공원으로 잘 조성된 곳이라서 깔끔한 곳이다. 많은 관광객의 방문은 물론 역사공원으로 창원시의 소중한 문화·관광자원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곳이다. 

네모로 축대를 쌓아 경계를 지은 사각형 무덤과 굄돌의 다리가 짧은 바둑판 모양의 고인돌 등 다양한 형식의 청동기시대 무덤을 살펴볼 수 있다. 

경상남도의 많은 지역은 일본과 교류를 했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특히 신라시대 이전의 가야왕국들은 일본의 국가들과 교류를 했는데 남부 최대 청동기 유적지인 진동리 유적은  야요이시대 연구사와 야요이 문화와 경남 해안지역 연관성을 설명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고인돌은 A, B, C, D 등으로 구분이 되어 있으며 석관묘와 남방식 고인들 등 한반도에서 발견되는 고인돌의 대부분의 형태를 확인할 수 있다. 

한국에는 많은 고인돌이 제주도를 비롯한 여러 섬에 퍼져 있는데 한국에서는 고인돌을 지석묘라고도 한다. 당시의 사람들이 절대적으로 믿고 있던 어떤 대상이나 자연의 힘에 관심을 가지고 여러 가지의 의식을 거행하던 '제단 고인돌'과 죽은 사람을 묻기 위하여 만들었던 '무덤 고인돌'로 크게 나눌 수 있다.  바다와 고인돌 사회의 세계관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창원 진동리 유적은 매우 중요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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